고은 시인 왈 “황진이 누나 이어 이 아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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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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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한 수 지어 달라” 시인들에게 청했더니

“시조 하고 있네∼.”

문인들이 종종 농담 삼아 하는 말이다.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하는 ‘답답이’를 비아냥거릴 때 주로 쓴다. 요즘 시조를 ‘한물간 장르’로 보는 문단 일부의 시각을 반영한다.

문화 장르별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시단과 시조계는 함축적인 언어미를 추구한다는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물과 기름처럼 지내왔다. 문예지도 따로 내고 모임도 따로 갖는다. 서로를 ‘한 수 아래’로 보는 폄하의 시각까지 있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문학평론가)는 이런 현실이 안타까웠다. 만해 한용운도 시조를 많이 썼고, 주요한 김동환도 적지 않은 시조를 남겼다. 김영랑 서정주 조지훈 박재삼 같은 걸출한 현대 시인들도 시조의 리듬과 형식을 현대시에 접목해 역작들을 꽃피웠다. 문단의 홀대 속에서 시조가 일본 전통시인 ‘하이쿠’에 비해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현실도 답답했다.

권 교수는 국내를 대표하는 원로 및 중진 시인들에게 ‘시조 한 수 지어 달라’고 청했다. 문단 경력 수십 년에도 시조를 써보지 않았다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취지에 공감한 이들은 생소하다면서도 끙끙대며 시조 한 수씩을 내놨다. 총 87명에게 부탁해 50수를 모았다. 김종길 고은 이근배 허영자 신달자 오세영 천양희 유안진 조정권 문정희 나태주 이문재 이재무 이은봉 정끝별 이정록 조용미 박형준 김언 등이 참가했다. 나머지 37명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시조 청탁을 하느냐’ ‘시조가 뭔지 모른다’ ‘쓸데없는 청탁은 하지 마라’라며 거절했다.

고은 시인은 시조를 갖고 한바탕 놀았다. 시조 ‘누나 진이에게’의 진이는 조선 시대 명기(名妓)이자 문필가인 황진이다. 고은 시인은 이런 시작메모를 동봉했다. “좀 안 근엄하고저 이런 염치 모르는 풍류를 빚어 보았소이다. 그동안 심심해하시던 황진이 누나 해골께서도 사뭇 반겨 마지않았소이다. 간밤 꿈에 이렇듯이 그이를 뵈었소이다.”

신달자 시인은 등단 48년 만에 첫 시조를 썼다. ‘어둠이 햇살자리 지우고/달빛자리 어둠을 지우고/여명 다시 달빛을 지우느니//그대여//너를 지워라 지워라/가는 세월을 불렀는데//너는 남아있고 내가 지워지느니’(시조 ‘공(空)’ 일부)

신 시인은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 짧은 황진이의 시조 속에 연애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의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한 편의 시조가 나는 어려웠다”며 ‘신인 시조 시인’이 된 감회를 밝혔다.

올해 86세인 김종길 원로 시인은 평생 시조 2수를 썼다고 털어놨다. 그 가운데 하나는 문우 조지훈(1920∼1968)이 먼저 세상을 떴을 때 장례행렬의 만장(輓章)으로 썼던 시조 ‘지훈(芝薰)과 영결(永訣)하며’였다.

‘일월산(日月山) 지초(芝草) 향기 맑고도 매웁더니/쉬흔을 못다 살고도 웃으며 떠나는가/술 익는 강마을에는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시인 50명이 낳은 시조들은 2012 만해축전의 일환으로 12일 오후 7시 강원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리는 ‘권영민의 문학콘서트-시조만세’(경기문화재단 후원)에서 공개된다. 고은 이근배 오세영 고형렬 등 시인들, 한분순 이우걸 홍성란 권영희 등 시조시인들이 한바탕 시와 시조를 놓고 소통하는 자리도 펼쳐진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문학#고은#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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