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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겐지이야기

사랑과 운명, 그리고 구원의 서사시

[ 源氏物語 ]

일본 문화의 우미한 표상 『겐지이야기』

일본 최고의 고전 작품이며 일본적 정서와 미의식 형성의 원류라고 일컬어지는 『겐지이야기(源氏物語)』는 11세기 초 한 여성작가에 의해 쓰여진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당시의 화려한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히카루겐지(光源氏)라는 남자 주인공의 사랑과 영화(榮華), 우수(憂愁)의 인생을 그린 이야기이다.

『겐지이야기』는 오랫동안 문학 작품으로뿐만 아니라 갖가지 문화, 예술 형태로 향수(享受)되고 재생산되어 오늘날까지 일본문화의 우미한 표상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1천 년에 걸친 베스트셀러 『겐지이야기』는 내용이나 주제, 정서면에서 당대 후대의 여러 문예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겐지이야기』를 읽지 않는 시인은 유감스러운 일이다"라고 할 정도로 오랜 세월에 거쳐 시인의 필수적인 교양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영향력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여 여러 문학작품 속에서 『겐지이야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또한 노(能)나 가부키(歌舞伎) 등의 전통예능에서 미술과 공예, 음악, 장식, 유희 등에 이르기까지 『겐지이야기』를 소재로 하거나 그 영향을 받은 장르는 실로 다방면에 이른다.

이러한 『겐지이야기』의 향수의 역사는 13세기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겐지학(源氏學)'이라고 불릴 정도로 방대하게 축적된 주석 및 연구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여전히 『겐지이야기』 연구는 연간 수백 편의 논문과 연구서를 쏟아낼 정도로 기염을 토하고 있으며, 학교의 교재로 빠짐없이 다루어지고 일반대중을 위한 각종 현대역과 개설서가 활발히 출간되고 있다. 그리고 연극, 뮤지컬,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각종 의식주문화에서 문화행사, 홍보 수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와 형태를 통해 오늘날의 『겐지이야기』의 문화현상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계속 확대되고 있다.

이렇듯이 1,000년 전의 작품이 일본 최고의 고전으로 여전히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고전을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자리를 빌어서 일본의 고전 『겐지이야기』의 문학적 향취와 상상력의 세계가 펼치는 고유의 매력에 접하고, 나아가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과 인생의 진실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그 하나의 지표로 '사랑', '운명', '구원'이라는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조명해보고 이를 통해 이 작품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겐지이야기』의 세계

무라사키시키부가 『겐지이야기』라는 기념비적인 대작을 후대에 남기게 된 데에는 그녀가 자란 가정환경, 그리고 몇 가지 인생의 계기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녀는 지방장관이자 문인이었던 아버지 다메토키를 통해서 학문적, 문예적 소양을 닦고, 당시의 중하류귀족들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면서 작가로서의 재능과 식견을 키워나갔다.

그녀가 『겐지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남편과 사별한 1001년부터이며 1008년경까지는 완성을 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편과의 사별이라는 불행이 그녀의 인생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가 되어 작품 창작의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005년경부터 쇼시 중궁의 뇨보1)로 활약하게 되는 궁중생활의 여러 경험들이 『겐지이야기』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겐지이야기』는 도읍 교토(京都)를 주무대로 하여 주인공 히카루겐지(이하 겐지)2)와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4대의 천황, 70여년의 세월과 49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방대한 스케일로 그려나가는 일대 서사시이다. 전 54권(卷)으로 되어있으며 내용상 크게 3부로 나누어진다.3)

제1부는 뛰어난 용모와 탁월한 자질을 갖춘 왕자(王子) 겐지가 신하(臣下)의 신분이 되어 스마(須磨)로의 퇴거4) 등의 시련을 극복하고 준태상천황(準太上天皇)5)의 지위에 오르기까지의 39년간의 이야기이다. 계모 후지츠보(藤壺)와의 금단의 관계를 중심으로 무라사키노우에(紫上), 로쿠죠미야슨도코로(六條御息所) 등 여러 여성들과의 사랑이 그려진다. 제2부는 겐지 40세부터 52세까지의 만년의 이야기이다. 제1부의 이상세계에서 반전하여 정처(正妻) 온 나산노미야(女三宮)의 밀통(密通), 무라사키노우에의 죽음 등을 통해 고뇌와 절망으로 신음하는 겐지의 모습이 조명된다. 제3부는 겐지의 사후 온나산노미야가 낳은 가오루(薰)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출가를 지향하는 가오루의 사랑과 방황, 그리고 오이기미(大君), 나카노기미(中君), 우키후네(浮舟) 등 여성들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겐지이야기』를 보는 시각은 12세기 말 이후 크게 두 갈래로 형성된다. 하나는 일본 문예의 중심인 와카(和歌)6)의 세계에서 『겐지이야기』 속에 흐르는 미적 정취를 시가(詩歌)의 본질로 이념화함으로써 형성되는 미적ㆍ문예적인 향수의 흐름이고, 또 하나는 『겐지이야기』의 연애사를 통해 불교적이고 유교적인 교훈을 찾고자 하는 공리적(功利的) 문예관이다. 그러다 근세인 17세기에 이르러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겐지이야기』의 본질이 인간의 진실된 감동과 인간성에 있음을 주창하고, 종교와 도덕의 구속에서 벗어난 문예로서의 자율성을 설파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겐지이야기』 이해의 기조가 되고 있다.

겐지의 사랑의 구도(構圖)

『겐지이야기』에는 겐지의 연애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사랑의 세계가 그려지고 있다. 제1부만 보더라도 금단의 여인 후지츠보(藤壺)를 비롯해서 냉정한 성격의 정처 아오이노우에(葵上), 이상적인 아내 무라사키노우에(紫上), 가련한 유가요(夕顔), 고집스러운 유부녀 우츠세미(空蟬), 고풍스러운 스에츠무하나(末摘花), 연상의 미망인 로쿠죠미야슨도코로(六條御息所), 정적(政敵)의 딸 오보로즈키요(朧月夜), 인종(忍從)의 여인 아카시노키미(明石君), 신을 모시는 아사가오(朝顔) 등등 여러 신분과 성격을 가진 여성들과의 개성적이고 극적인 사랑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사랑이야기의 배경에는 11세기 당시의 일본 귀족 사회의 일부다처제라는 현실이 놓여져 있다. 이 시대 귀족층에 있어서 한 남자가 정처(正妻)와 여러 명의 처첩(妻妾)을 두는 것은 일반적인 일로 여겨졌다. 귀족들의 결혼에는 당시의 계급사회를 반영하여 집안과 신분이 중시되었고, 그러한 조건이 결혼과 연애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다처(多妻) 그리고 자유로운 연애 그 자체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일은 없었다. 결혼, 연애 형태로는 남자가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여자의 집을 찾는 방문혼(訪問婚)의 성격이 아직 강했다. 결혼의 성립도 여자를 3일 동안 방문하는 의식(儀式) 정도를 거쳐 시작되며, 그 후 계속해서 여자의 집을 찾게 되는 동안에는 혼인관계가 지속되지만 마음이 변하여 방문을 하지 않게 되면 자연히 부부관계가 해소되는 식이었다. 즉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 결혼과 이혼은 대부분 제도적, 도덕적인 제약이나 절차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당사자들의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비교적 느슨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결혼과 연애에서의 자유분방함이 오늘날처럼 호색하고 방탕하고 부도덕적인 일로 비난받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여러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다정다감한 남자가 매력 넘치고 이상적인 남자로 여겨졌다. 물론 이와 같은 결혼제도와 연애관습에 의해 당시의 여성들이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사회적으로도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져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 같은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되, 겐지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연애가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애당초부터 신분과 용모, 인격과 심성, 정치적 수완과 학문, 교양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함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여성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절대적인 매력과 겐지 스스로도 사랑에 서슴없이 몸을 내던지는 열정을 지닌 인물로 설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호색적인 인물의 여성 편력과 애욕의 세계를 미화시킨 듯한 인상을 주지만, 후지츠보와의 금단의 사랑으로 인한 영혼의 방황이 여러 여성관계를 유발시켜나가는 과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필연성을 공감케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갈망이 결과적으로 겐지의 영화(榮華)나 운명과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는 데에 『겐지이야기』 생성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즉 겐지와 후지츠보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후에 천황으로 즉위함으로써 겐지는 준태상천황에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한편 로쿠죠미야슨도코로의 딸을 양녀로 삼아 천황의 중궁으로, 그리고 아카시노키미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을 황태자비로 입궐시킴으로써 미증유의 영화 이야기가 달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겐지의 사랑 중에서 후지츠보, 로쿠죠미야슨도코로, 무라사키노우에의 세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 주목해보자. 후지츠보는 겐지의 아버지 기리츠보(桐壺) 천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후궁이었다. 겐지는 죽은 어머니와 빼어 닮았다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후지츠보는 겐지의 아이를 갖기에 이른다. 겐지의 인생의 근간을 이루는 후지츠보와의 금단의 사랑과 여성편력의 방황은 비록 1,000년 전의 일본의 귀족사회를 무대로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윤리적인 거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니는 보편적인 의미일 것이다.

이성이나 사회적 통념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강렬하고 파멸적인 사랑의 열정과 기구한 운명이 극단적인 형태로 우리 앞에 놓여졌을 때 오히려 우리는 거기에서 인간존재의 진실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후지츠보와 겐지의 사랑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겐지이야기』가 택한 허구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로쿠죠미야슨도코로는 겐지에 대한 집착과 고뇌로 인해 원령(怨靈)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는 비극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전대(前代)의 황태자의 미망인으로 교양과 품위를 갖춘 귀부인이며 자존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어느 축제날 겐지의 모습을 몰래 보러 나온 그녀는 겐지의 본처 아오이노우에를 태운 수레 일행과 길 양보를 두고 시비가 붙었는데 숨겨진 애인인 그녀로서는 위세 당당한 상대편의 행패에 힘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떠나버린 겐지를 잊지 못하는 미련을 상대방에게 들킨 것이 굴욕적인 일이었다. 이 사건이 바로 비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일로 인해 겐지의 사랑을 둘러싼 고뇌는 깊어만 가고 드디어는 잠이 든 사이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간 원혼이 아오이노우에 곁에 날아가 그녀를 죽이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사람이 심한 고뇌를 겪으면 이로 인해 영혼이 육체로부터 이탈한다고 믿는 풍습이 있었다. 겐지는 남녀의 사랑의 이면에 숨어있는 애집의 추악함에 절망한다. 이러한 정념과 집착의 화신으로서의 원령은 겐지와 후지츠보를 비롯해 사랑을 두고 고뇌하는 이들 모두에게 숨어있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이 원령이 사랑의 영웅인 겐지의 모습을 항상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애착으로 인해 때때로 추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변하여 비극을 낳기도 한다. 누구나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사랑의 집착에서 그다지 자유롭지는 못하는 것이다.

겐지의 평생의 반려자인 무라사키노우에는 후지츠보를 대신하는 존재로서 등장한다. 그녀는 후지츠보의 조카로 그 용모까지도 빼어 닮았고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여 겐지의 이상적인 아내가 된다. 그러나 후년 겐지가 젊은 온나산노미야를 정실로 맞게 되자 무라사키노우에는 고뇌하는 여인으로 변모한다. 그녀는 마치 고뇌함으로써 그 이상성이 빛나듯 아름답게 그려져 가고, 회한 속에서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 겐지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은 모두 서로를 사랑하고 위하면서도 마음의 교감을 나누지 못하고 깊은 고독감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와 겐지 사이에는 단 한 명의 아이도 없었다. 당시의 일부다처제의 귀족사회에서 가문의 번영을 가져다줄 자녀의 존재는 아내로서의 지위, 따라서 사랑까지도 보장해줄 필수조건이었다. 그러한 현실 논리로서는 당연한 세속적 조건은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순수한 사랑과 신뢰만으로 두 사람은 맺어져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본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이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이유는 이러한 문학적 허구성의 달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겐지이야기』의 인물들

각기 다른 세 가지의 극한적인 사랑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 황당한 허구의 이야기에서 어느덧 이들의 기쁨과 고뇌, 절망에 동화되며 인간의 진실에 대한 공감과 영혼의 정화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애집(愛執)과 운명의 굴레

이제까지 겐지의 여러 사랑의 형태를 살펴보았는데 겐지의 삶의 궤적, 특히 후지츠보와의 사랑에서 우리는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죽은 어머니와 닮았다는 설정은 금단을 깨기 위한 필연성의 장치이며, 불의의 왕자의 탄생과 그 즉위는 왕권에 대한 침범이다. 이른바 이중의 금기를 어기고 죄를 떠안은 이들의 사랑이 절대의 영화를 결과한다는 것은 가히 '운명적'이다. 이러한 사랑과 운명의 결합은 신화적이며 고대적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실은 『겐지이야기』에는 겐지의 미래에 대한 세 가지 예언이 등장하여 이에 따라 제1부의 권세와 번영이 운명적으로 실현되어 간다. 즉 '왕에 오를 운명이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렇다고 신하의 신분으로 끝날 운명도 아니다', '세 명의 자식이 장래의 천황, 왕비, 신하의 최고위인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된다'라는 내용이다. 이 수수께끼는 후에 겐지가 레이제이(冷泉) 천황의 숨은 아버지로 신하의 신분이면서 천황에 준하는 준태상천황의 지위에 올라 진정한 왕권을 획득함으로써 풀리게 된다.

이와 같이 제1부의 이야기는 예언에 보장되어 영화로운 운명이 개척되어가지만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죄를 내장하고 있기에 불길한 비극의 발현을 예견케 한다. 겐지가 달성한 절대적인 번영과 이상세계는 제2부에 들어서 고뇌와 절망의 세계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그 발단이 된 것이 바로 겐지와 온나산노미야의 결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로 인해 겐지와 무라사키노우에의 이상적인 사랑의 평온이 깨지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운명의 복수가 시작된다. 온나산노미야가 가시와기(柏木)와 밀통하여 임신까지 하는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겐지는 절망에 빠지지만 그 옛날 아버지인 기리츠보 천황을 배신하고 후지츠보와 밀통한 죄의 응보(應報)로서 사태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겐지의 운명의 어둠이 재조명된 셈이다. 결국 온나산노미야는 가오루를 낳은 뒤 출가하고, 가시와기는 죄의식에 견디지 못해 죽게 된다. 남겨진 가오루를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여야할 겐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다시금 실감한다.

제2부의 세계에서는 겐지를 둘러싼 애집(愛執)과 운명의 문제를 통해 인간의 존재성이 깊이 파헤쳐지고 있는 듯하다. 온나산노미야의 밀통사건과 가시와기의 파멸적인 죽음은 겐지에게 과거의 과오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인식 이상으로 인간에게 운명적인 애집에 대해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겐지는 점차 밀통사건과 가오루의 탄생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인간의 벗어나기 힘든 애집과 불가사의한 운명을 불가분의 것으로 재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 후에 겐지가 원령으로 떠도는 로쿠죠미야슨도코로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그 애집의 모습에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을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겐지이야기』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애집의 무서움을 통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시선은 그 속에서 갈등하고 몸부림치는 인간 그 자체에 향해 있다.

영혼의 구원을 찾아서

앞에서 우리는 겐지를 둘러싼 사랑과 운명의 명암을 들여다보았다. 사랑의 열정과 영화로운 운명은 죄를 매개로 하여 인간의 고뇌와 절망의 세계로서 재조명된다. 여기에 인간의 영혼의 구원이라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이 당시의 종교, 즉 불교이다. 고뇌와 절망에 빠진 이들은 그 구원의 방법으로 출가를 지향하였다. 과연 종교적 세계는 모순의 존재인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겐지이야기』의 세계가 점차 어둠의 색채를 짙게 해갈수록 이러한 명제에 대한 물음이 강하게 던져진다.

겐지의 경우, 말할 나위도 없이 후지츠보와의 어두운 운명에 대한 자기구원의 절심함과 로쿠죠미야슨도코로의 원령을 통한 절망적인 애집의 인식이 출가 지향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권세와 번영의 길에 오르면서는 현세에 집착을 남기지 않는 이상적인 출가를 인생의 과제로 삼게 된다. 하지만 출가를 결심할 때마다 무라사키노우에를 비롯한 여러 집착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출가의 과제와 현실집착의 갈등은 그의 평생 동안 계속된다.

이 문제가 보다 무거운 의미를 지니며 그려지는 것은 역시 제2부의 세계부터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온나산노미야의 밀통사건, 로쿠죠미야슨도코로의 원령의 재출현 등 겐지의 세계를 사정없이 뒤흔드는 절망적인 사건들이 구원의 희구를 절실케 한다. 제2부에서 반복되는 겐지의 출가의 결의는 그러나 방황을 거듭하고 무라사키노우에를 잃고 1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실행되는 듯하다.

이렇게 종언하는 겐지의 일생을 통해 우리는 과연 종교가 겐지의 방황하는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을 다시 한번 던져본다. 대답은 회의적이다. 그것은 『겐지이야기』의 세계가 적어도 불교의 논리인 출가라는 형태로는 겐지의 구원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겐지의 영혼이 구원되지 않았다는 절망적인 결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겐지의 평온한 출가 여부를 구원의 지표로 삼기 보다는, 불교의 구제의 논리와는 다른 차원에서, 즉 문학적 세계의 논리에 의해서 그의 구원이 암시되고 있으며, 그 구원을 향한 몸부림 속에 인간존재의 진실이 담겨있음을 감지하는 것이 작품 이해에 있어서 보다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겐지이야기』는 불교사상을 인간을 추구하는 심오한 방법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에 수렴되지 않는 고유의 세계를 창조해 나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과 종교는 다르다는 자명한 사실, 문학 속의 종교를 바라보는 눈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본다.

사랑과 죄와 영혼의 구원의 문제는 제3부에서 새로운 주인공 가오루의 삶을 통해 다시 되물어진다. 독실한 구도자(求道者)의 면모로 등장한 가오루가 교토의 변두리 우지(宇治)를 무대로 구도(求道)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가오루는 오이기미(大君)에 대해 연정을 품게 되는데 그것은 세속적인 애욕의 세계를 넘어서 정신적인 유대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과 구도 사이에 당연히 일어나는 갈등도 쉽게 불도(佛道)의 명제에 수렴되어 버리고 그것이 상대에게 상처를 안기게 된다는 점이다. 항시 자기를 관념적으로 규정화하는 그에게서 우리가 겐지에게서 보았던 절대적 절망이나 영혼의 몸부림, 인간존재의 진실은 잘 느껴져 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과 자신의 존재성에 고뇌하며 몸부림치는 오이기미와 나카노키미(中君), 우키후네(浮舟)와 같은 여성들의 내면세계의 심오함이 돋보이게 된다. 『겐지이야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키후네가 살아나 불도의 길로 인도되고 가오루의 왜소한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짐으로써 막을 내린다.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여자들의 애절한 삶을 통해 모색되게 되지만, 그 해답 찾기는 역시 그리 쉽지 않은 듯 보인다.

『겐지이야기』는 종교적 구원에 대한 회의를 여운으로 남기면서 끝을 맺는다. 여전히 인간의 영혼의 구원은 숙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그리고자 한 것은 종교적 과제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이나 구원에 대한 회의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비극과 절망의 인간 군상이 그려지는 지평에는 이 작품이 기조로 하고 있는 인간 긍정이나 이에 대한 믿음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겐지이야기』의 매력

이제까지 '사랑', '운명', '구원'이라는 키워드를 발판으로 『겐지이야기』의 문학적 세계가 담고 있는 고유의 주제와 사상을 살피고, 그중 우리들에게 공감될 것으로 생각되는 범위 내에서 그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보았다. 『겐지이야기』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인간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의 만상과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파멸적인 열정이 요동치는 금단의 사랑, 절망적인 애집을 드러내는 비극적인 사랑, 현실논리를 초월한 순수한 사랑 등 문학적 허구를 구사한 극한적인 사랑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 속에 담겨있는 인간의 진실에 대해 공감하고 영혼의 정화됨을 느끼고 진정한 사랑의 소중함에 대해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또한 『겐지이야기』는 그러한 '사랑'의 문제를 통해 우리가 인생에서 돌연히 조우하게 되는 '운명'의 불가사의함을 인간 존재의 필연으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운명'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거대한 힘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는 것이 된다. 그 다음은 '구원'의 문제이다. 원죄(原罪)처럼 짊어진 존재의 모순에 대한 절망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희구는 오늘날의 우리들도 결코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영원의 명제일 것이다. 이 문제는 비단 종교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인생에서의 진정한 마음의 평온과 행복의 추구라는 문제로 통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인물들의 숨결 속에 생생하게 느껴지고 여기에 작가의 인간에 대한 애정어린 믿음이 짙게 배어있는 점이야말로 『겐지이야기』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고전이 여러 장치를 통해 작품세계 속에 숨겨 놓은 인생의 진실의 단편들을 하나씩 찾아내 우리들의 보편적인 진리로서 짜맞춰내는 작업, 그리고 그 문학적 감동에는 각별한 맛이 있다. 『겐지이야기』는 이러한 감동과 그것을 만끽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 있는 고전이라고 하겠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겐지이야기』를 여성을 중심으로 본다면 어떤 주제가 떠오르는가?
당시의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은 남자의 사랑에 좌우되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사랑의 고뇌를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재인식하고 주체적인 삶을 모색하려 하였다.

2. 『겐지이야기』를 겐지의 영화(榮華)에 중점을 두어 본다면 어떤 구조가 나타나는가?
『겐지이야기』의 영화의 이야기는 왕권을 상실한 겐지가 시련을 극복하고 진정한 왕권을 획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천황의 아버지로서 역사상의 유래가 없는 준태상천황의 자리에 오른다는 특유의 허구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3. 『겐지이야기』의 문학적 허구성이란 어떤 것인가?
역사적 사실이나 시대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이에 입각한 필연적인 리얼리티를 작품세계에 확보하면서 인간과 인생의 진실을 보다 선명하고 감동 있게 보여준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겐지(源氏)이야기 (상ㆍ하)』, 무라사키시키부 지음, 유정 옮김, 을유문화사, 1982.

각주

  • 1) 궁중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봉사했던 여성들을 말한다. 당시 후궁에는 우수한 재원(才媛)들이 많이 모아져 하나의 문화 살롱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당대의 뛰어난 여성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 2) '히카루'는 '빛을 발하다'는 뜻으로 용모와 자질의 절대적인 탁월함을 비유하고 있는 미칭(美称)이며, '겐지'는 '미나모토(源)'라는 성(姓)을 말한다. 겐지는 기리츠보 천황의 제2왕자로 태어났지만 불행한 장래를 사전에 피하기 위해 일부러 신하(臣下)의 신분으로 격하되어 성(姓)이 주어진 것이다.
  • 3) 제1부는 1권~33권, 제2부는 34권~41권이며 제3부는 42권~54권이다.
  • 4) 수자쿠(朱雀) 천황의 생모 고키덴(弘徽殿)과 외조부 우대신(右大臣)은 유력한 정적(政敵)인 겐지가 그의 딸 오보로즈키요(朧月夜)와 밀회한 것을 구실삼아 그를 조정에 대한 모반자로 몰고 정계에서의 축출을 모략한다. 겐지는 레이제이(冷泉)의 앞날에 누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유죄(流罪)의 선고 전에 스스로 스마(須磨: 현 고베(神戶)시)로 퇴거하게 된다.
  • 5) 왕위에서 물러난 천황을 태상천황(太上天皇)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겐지는 신하의 신분이어서 태상천황이 될 수는 없으므로 그에 준(準)한다는 뜻에서 준태상천황(準太上天皇)이라고 한 것이다. 대우는 태상천황과 동일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지위는 실제의 일본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6) 5ㆍ7ㆍ5ㆍ7ㆍ7의 음률을 갖는 일본의 전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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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모노가타리』가시와기(柏木)권

『겐지모노가타리』가시와기(柏木)권 출처: 도쿠가와 미술관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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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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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고전 입문서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오늘의 눈으로 동양의 고전을 다시 살펴보는 책이다. 주옥같은 동양의 고전을 망라하여, 서양 고전에 편중된 시각을 바로잡고 동양인의 사유의 뿌리를 찾아가게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7인의 편찬위원회가 각계 전문가들의 추천을 결산하여 선정한 72종의 고전을 4권에 나누어 담았다.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에는 각 분야에서 돋보이는 역량과 필력을 자랑하는 66인의 당대 지식인과 작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였다. 고전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며, 고전이 함축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식을 오늘 우리의 문제 상황에서 풀어내고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 고전을 재창조하는 살아 있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1권 『역사ㆍ정치』편에서는 3부에 걸쳐 16종의 고전을 15인의 전문가가 소개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작품 및 작가를 대상으로 꼭 읽어야 할 동양의 고전을 선별하였다. 다양한 독법과 다양한 코드의 문제 상황들이 고전의 세계로 입문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책이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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