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2006.03.03. 최종수정 : 2017.09.09
현대시조는 시조를 대역죄인으로 몰아 자손에게 까지 화(禍)를 미치게 하였다.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고, 시조는 패거리 때문에 죽었다.
■ 시조는 정형시가 아니다.
자수(字數) 구수(句數) 음의 성질에 따른 위치 등이 일정하게 정해진 시가 정형시라고 국어사전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정한 수의 음보와 악센트 소음절로 이루어진 시행(詩行)과 연구(聯句) 그리고 그 연을 반복하는 형식 따위는 올바른 정형시가 아니다. 정형시는 자수이어야 한다. 자수가 들쑥날쑥한 시조는 정형시가 아니다. 구수(句數)와 음보를 내세워 "시조는 정형시다"는 식자의 트릭에 사기당한 것이다. 시조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광의(廣義)의 정형시에 머무른다면 시빗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할 것이다.
■ 비록 역사는 바르게 가르치지 못할망정, 시조는 바르게 가르쳐야 했다.
시조를 파괴해야 존재할 수 있고 행세할 수 있는 패거리들이 신춘문예를 장악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뜯어 고친 것이 곧 시조의 법이 되었다. 시조의 지킴이가 되어야 할 학자마저 붓을 버리고 숟가락을 들었으니 정격은 서자가 되었다. 시조라는 소나무에서 송충이를 박멸하고 옛 기상이 회복되리라는 기대는 남북통일보다 어려워 보인다. 그들이 내세우는 “부득이한 경우 자수율을 무시해도 된다”는 억지와 “비정형이 정형이다”라 하여 소도 웃게 하는 재주로는 시조를 웃게 할 수 없다.
무릇 예외는 항상 기준을 붕괴시켰다. 제사보다 젯밥을 노리는 작자들이 궤변이라는 도끼로 시조의 팔다리를 자르며 희희낙락하더니 마침내 숨통을 끊어버렸다. 시조와는 달리 파괴되지 않은 하이쿠는 세계의 시로 화려하게 피었으나 시조는 독초로 인해 죽어버렸다.
■ 현대시조의 탄생배경과 시조계의 만행.
해방 후 일제가 말살한 민족문화가 하나하나 부활할 때 시조도 부활되었다. 그러나 시조의 “시짜”도 모르는 작자들이 시조랍시고 내놓은 잡동사니가 고시조에 비해 문학성이 현격히 뒤떨어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정체성을 부정하고 작법을 파괴하였다. “고시조 어투는 아무리 작품성이 좋아도 현대시조단서 외면당하기 십상이다”며 떠벌리는 작자들의 잡동사니에서 시조를 찾기란 그야말로 솔밭에서 바늘 찾는 것 보다 어려운 실정이라 시조를 다만 시대적 분류로 고시조와 현대시조로 나누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에이브라함 마즐로는 “가진 것이 망치밖에 없으면 모든 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 하였다. 가진 것이라곤 자유시 망치밖에 없는 작자들이 시조를 뚜드리더니 마침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을 연출하였다. 입으로는 시조의 부흥과 발전을 부르짖고는 있으나 시조의 부활을 경계하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면 속내와 만행을 알 수 있다.
우리 것을 지키지 못하는 민족성과 어깨동무한 패거리문화가 시조에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해방 후 한 건 주위에 편승한 이병기가 시조를 추락의 길로 인도하였고 무임 탑승한 작자들은 고철을 주우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일제 때 민족문화말살정책에서 말살된 시조가 해방과 더불어 해방되었다. 민족문학인 시조가 부활되었으니 미친년이라도 붙잡고 더덩실 춤추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현대시조는 3.8선 가르듯 시조도 고시조와 현대시조로 갈라놓고 반민족행위자가 던져버린 “한국문화말상정책하수인”이란 완장을 꿰차고 정체성을 부정하고 작법을 파괴하더니 옛말도 사용불가라며 떠벌리고 있다.
■ 무릇 문학이란 모국어로 써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현대시조서 금기하는 옛말과 문어에 딱히 국어사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현대어의 모체인 옛말을 부정하는 것은 한글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이쿠를 세계의 시로 승화시킨 일본은 외래어를 자제하고 하이쿠를 통해 옛말의 발굴을 장려하며 모국어를 갈고 닦고 있다. 그러나 현대시조는 외래어를 허용하면서도 옛말과 문어를 배척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을 읊은 것도 음풍농월이라며 홀대한다. 자연을 배제하면 심성은 우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는 작자들이 문전옥답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설치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 현대시조계 어른이란 작자도 지도자라는 작자도 시조를 짓지 못한다.
시조는 자유시보다 뒤울림이 커야 한다. 은유와 비유와 절제가 바로 뒤울림인 것이다. 자유시가 수면이라면 시조는 수중이다. 수면은 누구나 표현할 수 있으나 수중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수중의 것이 수면을 박차고 나와 용트림하는 것이 바로 시조인 것이다. 그 우렁찬 용트림을 만인 앞에 보여 주어야 할 책무가 지도자라는 감투를 쓴 자에게 있다. 그러나 어르신입네, 지도자입네 학자입네 우쭐대는 작자들이 시조를 학살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지도자와 학자들에 의해 시조의 근간은 하나 둘 비명횡사하였다. 시조는 시조이어야 한다. 시조의 그릇을 깨트려버리고 자유시를 쫓아가는 멍청한 짓거리는 없다. 시조는 자수율뿐만 아니라 내외적 요건도 형식도 엄격히 지켜야 한다.
■ 시조에 담지 못할 것은 저 세상에도 없다. 이병기가 “현대인은 복잡다단하기에 평시조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작법을 파괴한 이래 본디 짧은 것이 잡다하게 되더니 급기야 윤금초는 국적불명의 옴니버스시조라는 것으로 아예 소설을 쓰고 있다.
인생사 희로애락이 고대와 현대가 다를 리 없다. 설령 시조가 백자나 청자처럼 사라진다 해도 희로애락은 불변의 것이기에 인류가 생존하는 한 변질되지 않는다. 시조는 심적 산물이다. 심적인 것이 시조를 견인한다 해도 실언은 아니다. 시조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심적인 것 중 누구나 반듯이 거쳐야 하는 사랑을 추출하여 보자. 수많은 나날 남몰래 지새우며 속 태우던 전대의 사랑과 현대인의 인스턴트 사랑을 계량하면 어느 것이 깊고 무겁겠는가? “현대인은 복잡다단하기에 시조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가소롭다. 시조를 짓지 못하면 파리나 잡을 일이지 구차하게 시조 주위를 멤 돌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과연 조상의 감정은 현대인보다 복잡다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 현대시조는 배타성이 심하다. 현대시조론은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이기에 맹목적 종교집단이 되었다. 그들은 정격을 배척하고 파격을 달성하려고 시조를 개 끌듯 끌고 다니고 있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여는 자는 흥한다”고 칭기즈칸은 경고하였다. 시조다운 시조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소인배들이 성을 쌓고 있다. 황진이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탑을 쌓는다면야 돌조각이라도 들고 발 벗고 나설 일이다. 망루에는 열린마당이란 깃발이 휘날리고 있으나 성주로 군림하는데 방해된다 하여 게시물도 꼬리글도 삭제하더니 급기야 아이피를 차단하는 작태는 분노에 앞서 차라리 연민의 정이 치민다.
현대시조가 시조랍시고 내놓은 쓰레기를 보고 분노하고 허탈한 이가 비단 나뿐이랴. 시조는 자유시단서 낙오된 자를 구제하는 곳도 아니고 타 분야에서 행세하지 못한 자를 위한 곳도 아니고 정년퇴직한 자를 위한 경로당도 아니고 허파에 바람 든 사람에게 월계관을 씌어 주는 곳도 아니다. 시(詩) 중에 꽃이요 왕이 되어야 할 시조가 자유시단서도 한낱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독자에게 문전걸식한들 밥 한 숟가락 얻어먹을 수 있겠는가?
■ 시조가 그리 만만한 것이더냐?
제대로 된 시는커녕 글도 쓰지 못하는 주제에 시조의 대가인 양 거들먹거리며 시조를 파괴하는 짓거리는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매국노나 할 짓이지 보아 줄 수 없다. “수신제가후치국평천하”라 하였다. 국내부터 반듯하게 다져놓고 세계화를 외치는 것이 마땅하거늘 국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다. 어느 계파는 세계화를 떠벌리며 한 해에 세계어린이시조시인이랍시고 260명이나 배출하였으니 새삼 일러 무엇 하리. 전 국민이 더 나아가 전 세계인이 시조시인이 된다면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박수쳐야 할 일이다. 허나 현 추세라면 날아가는 까마귀도 시조시인인증서를 물고 거들먹거리며 오락가락 할까 그것이 두렵다. 시조가 그리 만만한 것이더냐?
■ 언제까지 천대받을 것인가? 문화올림픽이라 할 수 있는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주빈 국으로 선정되어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책 100권에 고우영의 만화 일지매는 있는데 시조집이나 관련 책은 단 한 권도 없었고 대표작에도 시조는 없었다. 게다가 한국문학을 소개할 문인 62명에 현대시조시인은 단 한 명도 끼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당했으니 그 잘나가는 지도자와 어르신네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태가 이러하니 교과서도 홀대하고 문화관광부서 선정한 “100대민족문화상징”에도 시조는 없었다. 소위 지도자이니 어른이니 하는 자들에게 묻는다. 초라한 성적표를 언제까지 감출 것이며 입이 백 개가 아니라 만 개라 해도 어떤 입으로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 시조의 문제는 백두산보다 높고 태평양보다 깊다. 시조는 17자인 하이쿠보다 무려 26자가 많다. 허나 현대인은 복잡다단하기에 담을 수 없다는 가당찮은 이유를 들이대며 시조를 깨트려버렸다. 43자도 적다는 무리에게 단 17자밖에 되지 않는 하이쿠를 맡겼다면 세계의 시는 고사하고라도 지금 쯤 과연 어떤 몰골을 하고 있을까? 철저하게 시조를 파괴한 어르신네와 지도자에게 묻는다. 시조가 무엇인지나 아는가? 당신들은 송충이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대답해 보라.
■ 시조는 달리지 못하고 있다. 현대시조는 시조의 향과 멋인 비유와 은유를 경계한다. “어렵게 쓰지 말라”고 하는 하루살이에게 이르나니 시조가 초등학생 글짓기더냐? 현대시조는 시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풍자시조는 눈 닦고 찾아 봐도 없다. 심히 한심스러운 것은 선로 폭을 제멋대로 조작해 놓았으니 정작 달려야 할 시조는 달리지 못하고 있다.
■ 소시 적 늑대소년이란 글을 읽었다. 밀림지대에 비행기가 추락하였다. 생존자는 젖먹이 한 명뿐이었다. 젖먹이는 늑대 젖을 먹고 늑대와 같이 생활하였다. 늑대소년은 네 발로 뛰고 늑대처럼 짖었다. 현대시조도 늑대소년과 같다. 두 발로 걷지 못하고 사람 말을 하지 못하는 늑대소년처럼 현대시조도 그러 하다. 인간은 인간에 말을 하여야 하고 시조는 시조에 말을 하여야 한다. 쌀가마니도 쌀보다 돌이 많으면 돌가마니라 한다. 돌가마니에서 돌을 축출하여 쌀가마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학자와 지도자의 사명이다.
당대인은 물려받은 유산을 갈무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러나 염불보다 잿밥을 노리는 패거리들이 걸레로 만들어 놓았으니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다.
■ 신춘문예는 시조를 학살하는 도살장이 되었다. 문화부기자들도 심사위원의 선정과정과 자격. 공모의 생명인 공정성과 심사과정을 불신한다. 차라리 본심을 없애든지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화려하고 공정한 등단 절차로 알려진 이 제도는 과연 완벽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한다.
시조도 예외일수는 없다. 더구나 시조이기를 거부하는 작자들이 신춘문예를 장악하였으니 신춘문예는 시조를 학살하는 도살장이 되었다. 신춘문예당선작이 과연 시조인지 여부는 접어두고라도 작품성도 논하기 민망할 정도다. 심사위원이 중고등학생이었다면 오늘날 시조는 이렇게 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감히 시조시인이라 말하지 말라.
밤하늘에 별만큼 패거리도 많고 많으나 그것도 적다며 쪼개서 딴 살림을 차리니 의무는커녕 책무를 책망하기도 민망스럽다. 독자는 접어두고라도 자유시단서도 현대시조계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보라. 각종 으리으리한(?) 시조문학상에 선정된 것은 시조의 사망통지서와 같다. 도저히 시조 잣대로는 잴 수 없어 자유시 잣대로 재어 봐도 쓰레기거늘 명시조라 우기니 독자라고 해 봐야 서로서로 추켜 주는 몇 몇 사람뿐이다.
감히 이르나니, 시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감히 학자입네 지도자입네 어른입네 껍죽대지 마라. 일본은 단 17자인 하이쿠를 60여 나라에서 2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각각의 모국어나 영어로 하이쿠를 읊으며 즐기고 있다.
하이쿠를 모르는 문인이 예상외도 많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국민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어느 작자는 “하이쿠가 세계적인 시가 된 것은 국력 때문이다”며 평가절하한다. 즉 돈으로 하이쿠를 세계의 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녕 상종하고 싶지 않는 이들에게 이르나니 제발 알고나 지껄여라.
■ 19세기 일본이 서구에서 문물을 수입할 때 유일하게 수출한 것이 바로 하이쿠다.
“마사오카시키”가 잡다한 하이카이의 문학성을 비판하고 첫 구만 떼어 낸 것이 하이쿠다. 하이쿠가 국제화가 된 것은 100년이 넘는다. 일본국내는 하이쿠시인 1,000만 명과 1,000여개의 결사가 있고 NHK가 다루고 있다. 문예지도 창간 100년이 넘는 문예지들을 필두로 1,000여 종이나 된다. 국외는 19세기 하이쿠가 알려진 이래 아프리카대륙에도 상륙하는 등, 세계 50여 나라에서 1,000만 명 이상이 모국어나 영어로 하이쿠를 즐기고 있다. 미국과 독일 등은 교과서에 실었고 세계 50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뉴욕타임지는 뉴요커를 대상으로 영국 등은 시민을 대상으로 공모한다. 유럽에는 아예 하이쿠 시인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고 영문 하이쿠시집이 계속 출간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하이쿠시대다. 일본은 단 17자로 세계를 정복하였다.
하이쿠뿐만 아니라 우키요에(浮世繪)도 세계 각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릴케’ ‘옥타비오 파스’ ‘알렌 긴스버그’ ‘게리 스나이더’ ‘체슬라브 미워쉬’ ‘윌리엄 워즈워스’ 등 문인 등이 “하이쿠”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카나가와의 큰 파도”에서 자극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여 클래식음악에 영향을 끼친 드뷔시와 ‘피카소’ ‘핀센트 반 고호’등 미술계는 우키요에(浮世繪)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이쿠는 세계적인 일본의 3대 문화유산이건만 시조는 100대 민족문화유산에도 없었다.
세계적인 하이쿠라 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시조를 생매장한 작자는 누구이며 그것도 양에 차지 않는지 부관참시 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하이쿠에 비해 전혀 손색없는 아니 상석에 앉아야 할 시조를 오늘날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소위 지도자입네, 어른입네, 학자입네 껍죽대는 이들에게 감히 묻는다. “당신들은 시조를 위해 무슨 짓을 했으며, 무슨 짓을 하고 있으며, 또 무슨 짓을 하려 하는가?”
■ 현대시조계에 이르나니 명심하라. 시조는 외적으로는 흐름이 강물 같아야 하고, 내적으로는 기승전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구와 장을 파괴하면서까지 자유시 옷을 걸쳤더니 그렇게 돋보이더냐? 글자 수만 맞추면 시조가 되는 줄 아는 이들에게 감히 이르나니 잔머리 굴려 퍼즐게임 하지 마라. 시조시인이라 일컬어지려면 어찌 시조가 천덕꾸러기가 되었는지도 살펴보고 매명을 위해 시조를 능멸하지는 않는지도 아울러 살펴보라.
짓거리가 미덥지 않아 다시 한번 이르나니 시조는 자유시단서 낙오된 자를 구제하는 곳도 아니고 타 분야에서 행세하지 못한 자를 위한 곳도 아니고 정년퇴직한 자를 위한 경로당도 아니고 허파에 바람 든 사람에게 월계관을 씌어 주는 곳도 아니다.
날개가 달릴 굼벵이는 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날 수 있지만, 날개가 달리지 않을 굼벵이는 제 아무리 나는 법을 가르쳐 줘도 날지 못한다는 것도 알라. 자신의 것이 시조는커녕 시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시조 바닥에서 영원히 떠나는 것이 늘 상 입버릇처럼 부르짖는 시조의 발전과 육성을 위한 참다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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