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시조 한 수가 지침 / 이병기
時調形式으로 不可能한 領域이 없다.
- 나의 스승을 말함 - 이병기(李秉岐)
어져 내일이여 그릴줄을 모르든가 이시라 하드면 가랴마는 제굿하야 보내고 가는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그게 무슨 소린가요?』
기자는 그대로 멍하니 이병기를 쳐다 보았다.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시조작가로서의 선생을 키워주신 은사(恩師)가 누구냐고 묻는 기자 말에 아무 대답도 않고, 李氏는 어수선한 오후의 학교 사무실에서 이렇게 시조를 읊은 것이다.
『선생의 스승이 누구시냐고 지금 여쭈었는데요?』
기자가 이렇게 재차 물어도 氏는 아무 대답이 없이 또 한 번 꼭같은 시조를 외운다. 이 어찌된 일인가 하고 영문을 모르고 앉았으려니까.
『하하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내놓으신다.
『왜 웃으십니까?』 『내 스승의 이름은 이렇게 길답니다』 『네?』
『지금 내가 왼 그것이 내 스승의 이름입니다. 상당히 길지요』 기자는 그제서야 氏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재미있는 어른이라고 혼자서 웃노라니,
『불행이 내게는 스승이 없었습니다. 내가 시조를 지어볼까 하고 생각한 것은 퍽 어려서인데, 처음에는 한시를 짓다가 이렇게 어려운 글로 시를 짓는다는 것이 헛된 노력같이 생각되었고, 또 아무리 한자가 조선사람의 글이 된 그 시대라 하더라도, 역시 조선사람의 감정을 조선말 아니면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라는 것을 우리말로 지어볼 생각이 들었으나, 그때는 불행히도 나를 지도해주실 선생이 없어서 부득불 황진이의 시조를 유일한 스승으로 삼고 연구했었지요』
『황진이의 년대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 4,5백여년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는 그만한 권위자가 없었던거요?』 『춘원(春園)외 몇 분이 역시 시조를 지었는데, 한 친구로서 서로 비평하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황진이 시대의 계통으로 누가 있을까요?』 『누구라고 지적할 수 없을만큼 다 그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황진이외에는 사숙(私塾 : 글방)한 어른이 안계십니까?』
『황진이와 정송강(鄭松江 :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과 고서면에 있는 정철(鄭澈)의 유적이 남아 있는 정자. 여기서는 정철을 말하는 것 같음) 어른이었는데, 황진이에게서는 주로 형식(形式)과 기교(技巧)ㆍ구성(構成) - 말하자면 이런 예술적인 부분을 배웠고, 정송강(鄭松江)에게서는 주로 기개(氣槪) - 지금 말로 하자면 사상(思想)이랄까 - 를 보았지요.
이조말의 고명한 시조작가인 안민영(安玟英 : 조선 후기의 가객으로 스승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조선 역대시가집《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하여 근세 시조문학을 총결산하는 데 공헌하였다) ㆍ박효관(朴孝寬 : 조선 후기의 가객.《가곡원류》를 편찬, 그때까지의 가곡을 총정리하고, 또 가인의 귀감이 될 가론(歌論)을 확립했다. 시조 13수가 전하며, 문학과 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두 분이 있었으나, 나는 별로 그들의 영향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마 황진이의 시조를 맨처음에 그렇게 읊으신데는 무슨..............』
『있지요. 지금까지 내가 본 시조 중에서는 이만큼 형식으로나 기교로나 구성으로나 잘 짜인 것을 못 보았습니다. 황진이의 시조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에 5ㆍ6수에 불과해도 그 5ㆍ6수가 정말 주옥같은 것입니다. 고금(古今)을 통해서도 이만큼 완성된 작(作)은 없지요. 그 기교(技巧)란 무서우니까 - 흔히 보면 공연히 글자 수와 형식에 사로 잡혀서 꼭 판에 박어낸 것만 같아서 염증(厭症)을 내게 합니다. 그러나 4,5백년전의 황진이의 시조는 실로 완벽(完璧)을 이룬 것이지요. 이 정도에만 이른다면 시조로서 표현 못할 것이 없습니다』
李氏는 기자를 세워놓고 또 한 번 황진이 시조를 고요히 읊는다.
- 1938.1.29 〈東亞日報〉-
출처 : 詩調硏究論叢 / 李泰極 著ㆍ乙西文化社. 1965년. 410~4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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