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와 매화 치기/오태환 - ◀ 원문보기 클릭 ▶

                                 능소화 / 정경화  어느 죽은 나무 위에 외따로이 터를 골라   둥기둥 둥기둥둥 엇박자 사랑가를   열두 줄 가얏고 삼아 뜯어놓는 저 손놀림    이국을 넘나들며 잠 못 드는 달빛 아래   그림자만 서성이는 우륵의 뒤뜰에도   저토록 붉은 설움을 한 잎 한 잎 떨구었을까    서라벌 돌담을 돌아 비 젖어 눈물이더니   늘어진 등걸을 엮어 바람 따라 가락이더니   뜨거운 해를 삼키며 먼 나라로 가고 있나                          ―『현대시학』, 8월호 현대시조와 매화 치기가끔 현대시조라는 이름으로 실린 시들을 읽을 때, 소위 현대시조란 무엇이며, 시조의 현대화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곤 한다. 이런 문제는 시조를 시조답게 이끄는 요소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해명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을 듯하다.시조의 특징은 무엇보다 시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와 멋이다. 그것은 슬픔이든 기쁨이든 결을 타고 흐르는 정서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떤 필름 같은 것에 투과된 듯한 느낌에서 우러나온다. 이조년의「다정가(多情歌)」나, 황진이의 ‘어저 내일이야’, 정인보의「자모사(慈母詞)」12번째 수首, 이은상의「사랑」 등은 그런 점에서 시조다운 여유와 멋을 감칠맛 있게 살려낸다.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補空)되고 말어라         ― 정인보, 「자모사(慈母詞)」14, 전문한겨울에도 다 입혀드리지 못했던 따뜻한 옷가지가, 어머니 돌아가신 후 관 속의 빈 틈을 채우는 데 소용되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내용의 곡진함을 차마 필설(筆舌)로 설명하기 어렵다. 독자들은 이 시를 대하면서 현대시와는 다른 질의 정한(情恨)을 느낀다. 그건 애끊는 서러움의 ‘풍류’다. 얼핏 서러움과 풍류가 모순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춤사위도 풍류의 정신에서 유로된 한 형태겠다. 어깻짓 발짓 따위의 춤사위로 서러움을 대신 표현하는 수는 그다지 드물지 않다. 오히려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서러움으로 눈물 흘리는 것보다 훨씬 더 절실해 보일 법하다. 시에 타고 흐르는 정서가 슬픔이든 기쁨이든 춤사위로 변용될 수 있는 융통성이 시조의 성질이며, 현대시와 구별되는 시조다운 여유와 멋이다. 이 시에서 비치는 서러움의 풍류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시조의 유장(悠長)한 4음보 율격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필름 같은 것은 시조의 율격이게 된다.유장한 4음보격은 시조라는 형식의 중핵(中核)이다. 유장한 4음보격이 아니면 시조가 아니다.그러나 시조라는 형식으로 발표되는 현대시조에서 4음보격이 훼손, 또는 파손된 게 아니라 아예 해체된 모습을 자주 겪게 된다. 대부분 실험이라는 형식으로 감행되는 듯하다. 시조라는 명시(明示)가 없다면 꼼짝없이 자유시로 읽을 도리밖에 없다. 4음보가 아닌 시를 시조라 우기는 것은 통화기능이 없는 전기밥솥의 뚜껑을 귀에 대고 전화하려는 것과 진배없다.오직 종장 첫음보만 3음절을 고수하면 시조의 형식을 지킨 게 된다는, 많은 시조시인이 견지하는 것 같은 믿음은 위험천만하다. 그렇지 않은 시조도 있다. 윤선도의「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40수가 대표적 일례다. 하지만 평시조에서 4음보를 지키지 않은 경우는 없다. 파격이 심한 사설시조의 중장이라도 4음보를 바탕에 까는 게 보통이다.시조의 현대화라는 화두를 실험이라는 포장 아래 4음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려 드는 경향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한 태도는 스스로 시조임을 부정하는 것이며, 기껏해야 현대시를 흉내낸 위조품을 생산하려 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구분하려는 태도 자체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나는 시조의 현대화라는 것은 허깨비를 추구하는 일종의 강박관념이라고 여긴다. 그것은 역으로 말해 현대의 한국화가가 산수화를 그린답시고 설산(雪山)의 고주사립옹(孤舟簑笠翁) 따위를 옮기거나, 풍속화를 그린답시고 소로 밭을 갈고 씨름하는 장면 따위를 찾아 헤매는 것만큼 참 이상하다. 현대를 살고 있는 시인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읊조렸다면 누구도 그것을 고시조라 하지 않는다. 억지로 인정해도 시조의 현대화는 시인 의식의 문제이지 형식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현대시학』8월호에 ‘현대시조 100주념’ 기념의 일환으로 현대시조특집이 실렸다. 정경화의 이 작품은 세 수로 구성된 연시조다. 고목(枯木)을 휘감아 오르는 능소화에서 모티프를 구한다. 할 수 있다면 시인에게 첫 수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삭제하라고 권하고 싶다. 제발 그냥 빈 채로 내버려 두라 말하고 싶다. 첫 수 하나로도 당겼다가는 풀고 또 다시 당기는 가얏고의 휘늘어진 음계를 타고 오르는 능소화의 젖은 등황(橙黃)과 낭창한 맵시를 베껴내기에 부족하지 않다. 뭔가 허전한 듯싶을 때가 사실은 여백이 꽉 찬 것일 때도 많다. 하물며 두 번째, 세 번째 수는 첫 수에서 보여 준 능소화의 깨끗한 이미지를 흐트러뜨릴뿐더러, 그다지 긴요하지 않은 감상까지 배어있는 듯하다. (세 번째 수 종장의 “뜨거운 해를 삼키며”의 이미지는 비에 젖은 능소화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시조라면 응당 비워둬야 할 여백을 두 번째, 세 번째 수가 무모한 개발업자처럼 포크레인으로 매립해 버리는 것 같다. 화선지에 매화를 칠 때, 줄기 위에 곁가지를 하나 더 심어 넣을까 말까 수십 차례 망설이다, 끝끝내 참는 마음이 시조의 마음이다. 그 텅, 빈 채로 허허로운 채로 내버려 둔 공간은 비로소 시조다운 여유와 멋이 샘솟는 우물이 된다. 시조의 씨[핵(核)]다.고시조 가운데 윤선도의 것을 제외하면 연시조가 드문 데 비해, 요즘 쓰여지는 시조는 거개가 연시조다. 단지 ‘현대인의 복잡다단한 의식과 정서를 짧은 단시조에 풀어 넣기 어렵기 때문에’ 같은 궁핍한 해명에는 선뜻 수긍할 수 없다. 많은 시조시인들이 ‘현대’와 ‘실험’에 집착한 나머지, 고시조로부터 시조다운 흥건한 여유와 멋, 진짜 시조다운 여백의 매력을 배우고 느끼는 데 소홀한 탓이라 여긴다면 나 혼자만의 투정일지 모르겠다.

ㆍ작성자 검정삿갓
ㆍ작성일 2007/10/22 (월) 13:06
ㆍ분 류 시조
ㆍ출처1 oth525?Redirect=Log&logNo=100042385138 (Down:22567)
ㆍ조회: 11743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주소 퍼가기
현대시조와 매화 치기/오태환


                                 능소화 / 정경화

  어느 죽은 나무 위에 외따로이 터를 골라
  둥기둥 둥기둥둥 엇박자 사랑가를
  열두 줄 가얏고 삼아 뜯어놓는 저 손놀림 
 
  이국을 넘나들며 잠 못 드는 달빛 아래
  그림자만 서성이는 우륵의 뒤뜰에도
  저토록 붉은 설움을 한 잎 한 잎 떨구었을까 
 
  서라벌 돌담을 돌아 비 젖어 눈물이더니
  늘어진 등걸을 엮어 바람 따라 가락이더니
  뜨거운 해를 삼키며 먼 나라로 가고 있나

                         ―『현대시학』, 8월호

 
현대시조와 매화 치기

가끔 현대시조라는 이름으로 실린 시들을 읽을 때, 소위 현대시조란 무엇이며, 시조의 현대화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곤 한다. 이런 문제는 시조를 시조답게 이끄는 요소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해명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을 듯하다.

시조의 특징은 무엇보다 시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와 멋이다. 그것은 슬픔이든 기쁨이든 결을 타고 흐르는 정서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떤 필름 같은 것에 투과된 듯한 느낌에서 우러나온다. 이조년의「다정가(多情歌)」나, 황진이의 ‘어저 내일이야’, 정인보의「자모사(慈母詞)」12번째 수首, 이은상의「사랑」 등은 그런 점에서 시조다운 여유와 멋을 감칠맛 있게 살려낸다.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補空)되고 말어라

         ― 정인보, 「자모사(慈母詞)」14, 전문


한겨울에도 다 입혀드리지 못했던 따뜻한 옷가지가, 어머니 돌아가신 후 관 속의 빈 틈을 채우는 데 소용되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내용의 곡진함을 차마 필설(筆舌)로 설명하기 어렵다. 독자들은 이 시를 대하면서 현대시와는 다른 질의 정한(情恨)을 느낀다. 그건 애끊는 서러움의 ‘풍류’다. 얼핏 서러움과 풍류가 모순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춤사위도 풍류의 정신에서 유로된 한 형태겠다. 어깻짓 발짓 따위의 춤사위로 서러움을 대신 표현하는 수는 그다지 드물지 않다. 오히려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서러움으로 눈물 흘리는 것보다 훨씬 더 절실해 보일 법하다. 시에 타고 흐르는 정서가 슬픔이든 기쁨이든 춤사위로 변용될 수 있는 융통성이 시조의 성질이며, 현대시와 구별되는 시조다운 여유와 멋이다. 이 시에서 비치는 서러움의 풍류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시조의 유장(悠長)한 4음보 율격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필름 같은 것은 시조의 율격이게 된다.

유장한 4음보격은 시조라는 형식의 중핵(中核)이다. 유장한 4음보격이 아니면 시조가 아니다.
그러나 시조라는 형식으로 발표되는 현대시조에서 4음보격이 훼손, 또는 파손된 게 아니라 아예 해체된 모습을 자주 겪게 된다. 대부분 실험이라는 형식으로 감행되는 듯하다. 시조라는 명시(明示)가 없다면 꼼짝없이 자유시로 읽을 도리밖에 없다. 4음보가 아닌 시를 시조라 우기는 것은 통화기능이 없는 전기밥솥의 뚜껑을 귀에 대고 전화하려는 것과 진배없다.

오직 종장 첫음보만 3음절을 고수하면 시조의 형식을 지킨 게 된다는, 많은 시조시인이 견지하는 것 같은 믿음은 위험천만하다. 그렇지 않은 시조도 있다. 윤선도의「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40수가 대표적 일례다. 하지만 평시조에서 4음보를 지키지 않은 경우는 없다. 파격이 심한 사설시조의 중장이라도 4음보를 바탕에 까는 게 보통이다.

시조의 현대화라는 화두를 실험이라는 포장 아래 4음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려 드는 경향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한 태도는 스스로 시조임을 부정하는 것이며, 기껏해야 현대시를 흉내낸 위조품을 생산하려 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구분하려는 태도 자체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나는 시조의 현대화라는 것은 허깨비를 추구하는 일종의 강박관념이라고 여긴다. 그것은 역으로 말해 현대의 한국화가가 산수화를 그린답시고 설산(雪山)의 고주사립옹(孤舟簑笠翁) 따위를 옮기거나, 풍속화를 그린답시고 소로 밭을 갈고 씨름하는 장면 따위를 찾아 헤매는 것만큼 참 이상하다. 현대를 살고 있는 시인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읊조렸다면 누구도 그것을 고시조라 하지 않는다. 억지로 인정해도 시조의 현대화는 시인 의식의 문제이지 형식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현대시학』8월호에 ‘현대시조 100주념’ 기념의 일환으로 현대시조특집이 실렸다. 정경화의 이 작품은 세 수로 구성된 연시조다. 고목(枯木)을 휘감아 오르는 능소화에서 모티프를 구한다. 할 수 있다면 시인에게 첫 수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삭제하라고 권하고 싶다. 제발 그냥 빈 채로 내버려 두라 말하고 싶다. 첫 수 하나로도 당겼다가는 풀고 또 다시 당기는 가얏고의 휘늘어진 음계를 타고 오르는 능소화의 젖은 등황(橙黃)과 낭창한 맵시를 베껴내기에 부족하지 않다. 뭔가 허전한 듯싶을 때가 사실은 여백이 꽉 찬 것일 때도 많다. 하물며 두 번째, 세 번째 수는 첫 수에서 보여 준 능소화의 깨끗한 이미지를 흐트러뜨릴뿐더러, 그다지 긴요하지 않은 감상까지 배어있는 듯하다. (세 번째 수 종장의 “뜨거운 해를 삼키며”의 이미지는 비에 젖은 능소화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시조라면 응당 비워둬야 할 여백을 두 번째, 세 번째 수가 무모한 개발업자처럼 포크레인으로 매립해 버리는 것 같다. 화선지에 매화를 칠 때, 줄기 위에 곁가지를 하나 더 심어 넣을까 말까 수십 차례 망설이다, 끝끝내 참는 마음이 시조의 마음이다. 그 텅, 빈 채로 허허로운 채로 내버려 둔 공간은 비로소 시조다운 여유와 멋이 샘솟는 우물이 된다. 시조의 씨[핵(核)]다.

고시조 가운데 윤선도의 것을 제외하면 연시조가 드문 데 비해, 요즘 쓰여지는 시조는 거개가 연시조다. 단지 ‘현대인의 복잡다단한 의식과 정서를 짧은 단시조에 풀어 넣기 어렵기 때문에’ 같은 궁핍한 해명에는 선뜻 수긍할 수 없다. 많은 시조시인들이 ‘현대’와 ‘실험’에 집착한 나머지, 고시조로부터 시조다운 흥건한 여유와 멋, 진짜 시조다운 여백의 매력을 배우고 느끼는 데 소홀한 탓이라 여긴다면 나 혼자만의 투정일지 모르겠다.




   
  0
7000
윗글 채현병의 시조 평
아래글 2007년 신춘문예시조당선작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파일 링크 홈
35 하이쿠 배고픈 오후 눈으로 먹는다네 이팝나무 꽃 검정삿갓 2013/03/29 9701
34 시조 누나 진이에게 / 고은 검정삿갓 2012/08/26 9780 1 : DN:22558
33 시조 채현병의 시조 평 [1] 검정삿갓 2012/04/20 9187
32 시조 현대시조와 매화 치기/오태환 검정삿갓 2007/10/22 11743 oth525?Redirect=Log&logNo=100042385138 : DN:22567
31 시조 2007년 신춘문예시조당선작 검정삿갓 2007/01/06 15478
30 시조 동지 달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검정삿갓 2006/11/26 13515
29 시조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검정삿갓 2006/01/15 10948
28 시조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검정삿갓 2006/01/15 10206
27 시조 중앙시조대상 및 신인상 24회 / 홍성란 검정삿갓 2009/10/27 11632
26 시조 달빛찬 마당가로 / 서지숙 검정삿갓 2009/10/27 12134
25 시조 중앙시조대상 20회 / 민병도 검정삿갓 2009/10/27 12144
24 시조 중앙시조대상 15회 / 박시교 검정삿갓 2009/10/27 10270
23 시조 중앙시조대상 14회 / 이우걸 검정삿갓 2009/10/27 9634
22 시조 중앙시조대상 13회 / 유재영 검정삿갓 2005/10/26 9640
21 시조 고향생각 / 정완영 검정삿갓 2005/10/17 11936
20 시조 중앙시조대상 12회 / 윤금초 [3] 검정삿갓 2005/10/15 10348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