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지순한 매창의 사랑 / 신바회
1. 매창과 촌은
조선 시대 여류 시인이라면 규수시인 허난설헌, 기녀 시인 황진이와 매창을 들 수 있다.
매창은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선조 6년(1573)에 태어났다. 계유(癸酉)년에 태어나서 계생(癸生)이라고 불렀다. 기생이 된 뒤 애칭인 계랑(癸娘)으로 고쳐불렀다. 아호는 매창(梅窓), 자는 천향(天香)이다. 광해군 2년(경술, 1610)에 죽었다. 나이는 38세이다.
계생의 자는 천향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어 불렀다.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의 딸이다. 만력 계유에 나서 경술(1610)에 죽으니 나이 서른 여덟이었다. 평생 노래 부르기와 시 읊기를 잘 했으며 당시 수백 편이 한 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더니, 지금은 거의 흩어져 없어졌다. 숭정 후 무신년(1668) 10월에 아전들이 외우며 전하던 여러 형태의 시 58수를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에 새긴다. 절의 중들이, 戊申年 12월 개암사에서 개간하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다. 출신 성분 때문에 기녀가 되었으나 몸가짐이나 행동이 발랐으며 절개가 곧았다.
부안읍 진산인 성황산(일명 상소산)은 부안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공원이자 경관 또한 빼어난 명산이다. 이 산은 1848년(헌종 무신)에 당시 현감 조연명이 서림이라 불리는 이 산에 많은 나무를 심고 서림정을 지어 꾸몄다. 정자 옆 암벽에는 맑은 물이 솟는 혜천(惠泉)이라는 샘이 있고 그 옆에 너러바위가 있다. 예로부터 그 곳에서 시인 묵객들이 시회를 열었다. 지금도 너러바위 일대에 현감, 문인들이 각명해 놓은 싯귀들이 산재해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계생은 자연스럽게 거문고와 시문을 익혔다. 기생이었지만 그는 몸가짐을 조신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다.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 못 알고 있어라.
― 추사(愁思)
매창은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빛을 사랑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어했다. 기생 신세를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자신의 뜻을 모르고 세상사람들은 손가락질한다는 것이다. 시속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려는 그녀의 깨끗한 품성을 알 수 있다.
당시 촌은 유희경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유희경은 자는 응길, 호는 촌은이며 본관은 강화이다. 천민이었지만 시인으로 유명했으며, 예론(禮論)과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은 물론 평민들의 장례까지 그에게 문의할 정도였다. 영의정 박순을 비롯하여 많은 양반 사대부들이 그와 사귀었다. 촌은은 평생 92세를 엄격하고 깨끗하게 살아왔다.
유희경은 선조 25년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광해군 10년(1618) 이이첨의 인목대비 폐모 상소문에 반대, 시골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인조반정(1623) 때 절의로 포상되어 가의대부에 이르렀고 뒤에 판윤으로 추증되었다.
매창은 둥그스럼한 얼굴에 덕스럽게는 보였지만 얼굴이 빼어나지는 않았다. 마음은 그지없이 아름다웠고 거문고를 잘 탓으며 시문에 능했다. 이에 촌은이 그만 파계하고 만 것이다. 요염한 자태로 유혹했을리 없고 그런 유혹에 빠질 촌은도 아니었다. 이심전심 풍류와 시로서 통했다.
가정 생활에 불만이 없었을 촌은이 일생을 두고 매창을 못잊어 한 것을 보면 인간의 애정 생활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촌은집(村隱集)] '행록(行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젊었을 때 부안으로 놀러갔었다.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시로 유명하다는 소문을 서울에서 이미 듣고 있었다. 부안에 이르자 객이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역시 천민출신)의 이름이 이 곳 멀리까지도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촌은은 일찌기 기생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파계했다. 그리하여 계생 역시 한시를 잘 했다. 세상에 [매창집]이 간행되어 전하고 있다.
매창에게는 집적거리는 손님이 많았다. 점잖게 다가오는 손님도 있었고, 강압적으로 덤벼드는 취객도 있었다. 다음과 같은 재치로 위기를 넘겼다.
취한 손 마음 두고 적삼 끌어 당겨
끝내는 비단 적삼 찢어놓았네
그까짓 비단옷 아까울 게 없지만
님이 주신 정까지 찢어질까 두려워.
― 증취객(贈醉客)
기생 생활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옛날이라고 어찌 술자리에서 짓궂은 손님이 없을 수 있겠는가. 술 취한 손님에게 옷을 찢기우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인정이 끊길까 두려워하고 있다. 매화처럼 고고하지만 고요하고 인정미가 넘쳐흐른다. 매창의 한없이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씨에 어느 남성인들 감동하지 않겠는가.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법. 인정만은 돈으로 살수도, 팔 수도 없는 것이다. 하루 아침에 깊어지는 것도 아니요, 오랜 세월이 지나야 제맛이 나는 게 정이다. 그윽한 매창의 인격에 촌은인들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촌은을 만나며
촌은이 부안의 명기 매창을 처음 만나게 된 때는 임진왜란 직전, 1591년 쯤으로 보인다. 어느 날 촌은이 부안에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동안 촌은의 풍류와 시를 흠모해왔었던 터였다. 만나보고 싶은 시인이었다. 계생에게는 뜻하지 않은 기쁨이요, 더 없는 영광이었다. 더디 피는 매화를 기다리는 임으로 비겨 시 한 수를 읊었다.
봉래산 북쪽에 흰눈이 쌓여
매화꽃 피기가 마냥 더디오.
봄이 오면 일찌감치 피어나련만
그 꽃을 어느 누가 보아주려나
― 정이사군(呈李使君)
촌은 같은 이가 아니면 누가 보아줄 것인가. 산에는 아직 매화가 피지 않았는데 자신의 마음 속에는 벌써부터 피어있었다. 촌은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술좌석은 무르익어갔다. 매창에게 거문고 한 곡조를 부탁하였다. 연주가 끝나자 촌은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절창이었다. 촌은은 매창을 지그시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 시 한 수를 읊었다.
일찍이 남국의 계량 이름 들리어
시와 노래로 서울까지 울렸도다
오늘에야 그대 모습 대하고 보니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것만 같구나
― 증계랑(贈癸郎)
옷고름 매만지며 다소곳 듣고 있던 매창은 다음과 같은 시로 화답하였다.
몇해 동안 비바람 소리를 내었던가
여지껏 지녀온 작은 거문고 하나
외로운 곡조는 타지나 말자더니
끝내 [백두음]가락 지어서 타네.
― 탄금(彈琴)
오랫동안 외로움과 고독에 살아온 계생이었다. 누구하나 마음을 줄 사람이 없었다. 시속에 물든 사람들일 뿐이다. 이제야 임을 만난 것이다. 백년해로하고 싶은 심정을 백두음에 비겨 고백하고 있다. 계생은 거문고 줄에 유희경은 음률에 맞춰 다시 시를 읊었다.
나에게 신기로운 선약이 있어
찡그린 얼굴도 고쳐 줄 수 있으니
금낭 속에 간직한 귀한 그 약을
정다운 그대에게 아낌없이 주리라
― 증계랑(贈癸郎)
분위기는 점점 익어갔다. 찡그린 얼굴도 고쳐줄 수 있는 선약이 내게 있다니. 사랑을 선약에 비유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이 풍류객의 멋과 운치가 아니겠는가. 그러한 사랑의 선약을 정다운 그녀에게 아낌없이 준다는 것이다.
서양에도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이라는 오페라가 있다. 이 약을 먹기만하면 사랑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묘약을 먹고 부르는 테너,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져며오는 아름다운 노래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약의 힘을 빌어서라도 사랑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매한가지이다. 계생은 감동하여 이에 거문고로 화답하였다.
내게는 그 옛날의 거문고 있어
한번 타면 온갖 시름 다 생긴다네.
세상에는 이 곡조를 아는 이 없어
그 옛날 왕자교의 생황에다 화답하리.
― 증별(贈別)
계생은 자신의 거문고를 임의 생황에 맞춰가겠다고 화답했다. 맑은 거문고의 음율과 굵직한 촌은의 목소리는 그들만이 느끼는 아름다운 화음이었다. 멋진 화답송이다. 20세의 계랑과 50세의 촌은의 사랑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정비석의 [명기열전] '계랑'에서 이 부분을 전재한다.
이날 밤 두 사람은 시와 거문고로 어울려가며 무한한 정취를 나누다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원앙금침 속에 들었다.
유희경은 계생의 무르익은 몸을 가슴 그득히 품어 안으며 말한다.
"내 오십평생의 지조를 너로 인해 파계하게 되었으되 이는 진실로 금생의 탁문군을 만난 기쁨이로다."
계생은 유희경의 넓은 품속에 폭 감싸안기며 대답한다.
"소첩은 비록 천한 몸이오나, 그런대로 공규(空閨)를 깨끗하게 지켜온 보람을 오늘밤에야 기쁨으로 느끼게 되옵나이다."
"오오, 영절한지고! 너는 정녕 이 세상에 잘못 태어난 월중항아가 분명하도다. !"
오는 말에 정이 가고 가는 말에 정이 와서 운우의 시간이 흐를수록 무르익었다.
마침내 사나이가 거칠은 호흡으로 몸을 점령하려들자 계생은 팔을 붙잡으며 호소한다.
"소첩은 사전에 백두음을 불러보고 싶나이다."
인연을 맺기 전에 백년해로의 맹세를 하자는 뜻이었다.
"그 일랑 염려말아라. 이심전심인 우리 사이에 백두음이 무슨 필요 있겠느냐."
계생은 그 소리를 듣고나자 기쁜 마음을 금할 길 없어 오랫동안 굳게 닫아 두었던 옥문을 활짝 열어 정다운 임의 정열을 마음껏 받아들였다.
촌은과 매창은 내소사로 구경갔다. 봄이었다. 꽃은 여기저기에서 피어났다.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왔다.
물소리는 아직도 차가운데 어디선가 목동의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용안대 넓은 바위에 올랐다. 내려다보니 서해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를 일러 장안의 으뜸가는 호걸이라네
구름 깃발 닿은 곳에 물결은 고요해라
오늘 아침 님을 모셔 신선 얘기 들었는데
제비는 동풍 맞아 지는 해에 높이 떴어라.
― 등룡안대(登龍安臺)
대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유희경을 일대 호걸이라고 노래했다. 매창은 기상이 웅대한 풍류객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만큼 촌은을 깊이 사랑했다. 촌은도 이에 화답하였다.
버들 피는 꽃시절은 잠깐인 것을
여윈 몸 주름진 얼굴 고치기 어려워라
선녀인들 독수공방 어이 참으리
무산의 운우의 정 자주 나누세
― 희증계랑(戱贈癸娘)
계생이 장군하니 촌은이 멍군한다. 멋들어진 연애시이다. 풍류객다운 촌은이다. 얼마나 진솔하고 인간적인가. 청춘은 잠깐이니 늙기 전에 자주 만나 운우의 정을 마음껏 나눠보자는 뜻이다. 두 사람의 마음이 척척 들어맞는다. 매창과 촌은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이 되어버렸다.
3. 촌은과의 이별
선조 25년 (1592년) 4월 14일 왜구들이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공해왔다. 임진왜란이었다. 유희경은 우국지사였다. 국가를 위해 사랑을 버리는 것이 의와 충이라고 생각했다. 유희경은 상경하여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왔다. 짧았던 만남이었다. 매창과 촌은에게는 가혹한 운명이었다.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하룻밤만 묵어가라는 간곡한 계랑의 간청을 촌은은 거절했다. 임과 헤어지는 무너지는 아픔을 어떻게 달래라는 말인가.
동풍 불며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버들잎과 매화가 다투어 피었어라
이 좋은 봄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술잔을 앞에 놓고 임과 헤어지는 일이라
―자한(自恨)
뼈가 타도록 저려오는 이 고독감. 사랑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 어디에 있으랴. 잊으려해도 잊을 수가 없고, 생각하지 않으려해도 생각 나는 것이 오매불망 사람의 마음이다. 매창은 다정다감한 시인이었다. 얼마나 아팠으면 그런 시를 붉게 쏟았을까. 그런 시인이기에 몸과 마음을 촌은에게 아낌없이 주었던 것이다. 대문을 첩첩 닫아걸었다. 그리움은 날로 더해만 갔다. 베갯머리를 적실 뿐, 기약없이 떠나간 사람이다. 매창은 눈물과 시로 달래볼 수밖에 없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문닫고 누웠으니
옷자락 하염없이 눈물에 젖는구나
홀로 누운 잠자리는 한없이 외로운데
뜨락 가득 가랑비 내려 노을도 막았어라
― 규원(閨怨)
상경 후 일자 소식이 없다.
계랑은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짓고 아예 수절을 하였다.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더라
봄비가 내리는데 배꽃이 흩날린다. 울면서 임과 이별하였다. 가을이 되었다. 임은 나를 생각하는지. 추풍 낙엽에 귀를 쫑긋 세우는 이 안타까움을 어찌하란 말이냐. 임은 천리 밖에 있고 나는 꿈 속에서 몸부림칠 뿐이다. 촌은은 너무나 깊은 정을 주고 갔다. 촌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은 이렇게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매창은 다른 남자에게 정을 주지 않고 줄곳 절개를 지켰다. 유희경도 매창을 향한 그리움이 매창 못지 않았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보지 못하고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 회계랑(懷癸娘)
하나는 서울에 있고 하나는 부안에 있어 그리워도 볼 수가 없다. 오동나무에 비뿌릴 때는 애간장이 끊어진다. 얼마나 사무쳤으면 그랬을까. 보고 싶은 마음이야 계랑 못지 않았다. 몸은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매창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그리워도 말못하는 애타는 심정
하룻밤 시름으로 머리가 세었어라.
얼마나 괴로운가 알고 싶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 보소
― 규원(閨怨)
상사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하루 하루 괴로움에 몸은 수척해갔다. 헐거워진 금가락지를 보라고 했다. 호소할 길 없는 애타는 심정을 헐거워진 금가락지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말로 어찌 다 할 수 있으랴. 그리워도 말못하는 매창의 심정은 촌은보다 더했으리라.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금가락지까지 헐거워졌단 말인가. 그것 하나로 사무치는 정을 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헤어진 뒤 다시 만날 기약이 없어
아득히 먼 곳에 임만 그리오.
언제나 함께 동쪽 달을 볼꺼나
완산에서 취했던 시나 읊조릴 밖에
― 기계랑(寄癸郎)
촌은은 전주에서 매창과 함께 노닐었던 옛일을 회상하고 있다. 함께 달을 언제면 바라볼까. 기약이 없으니 취했던 시나 읊조릴 수밖에 없다.
이들은 식영정에도 갔다. 식영정은 전라남도 창평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다. 송강 정철의 외척 김성원의 정자로 시인 묵객들이 시를 읊조리던 유명한 곳이다. 이 곳을 촌은과 매창이 함께 찾아가 노닐었던 것이다.
이 시는 촌은이 매창과 식영정에서 노닐던 시절을 회상한 시이다. 매창가의 달빛이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등산 앞에는 식영정이 있거니
못가의 가는 풀들 쓸쓸도 하이
낮은 구름 비를 빚어 밝은 달을 가리니
매창의 하룻밤이 어둡기만 하구나.
― 식영정(息影亭)
4. 허균과의 만남
1601년 7월 23일 허균은 부안에서 매창을 만났다. 매창이 촌은과 이별한 약 10년 후의 일이다. 수절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기는 하지만 일생 동안 수절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허균을 만나기 전 김제 군수로 내려온 이귀가 매창을 만났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는 1601년 3월 21일 조정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석달 후 허균은 매창을 만난 것이다. 허균은 매창이 이귀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루 종일 시와 술을 주고 받으며 즐겼지만 함께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다. 사실 매창이 이귀의 애인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촌은과 이별 후 수절했다면 마음을 준 사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해운 판관이 되어 매창과 함께 부안에 머물렀다.
부안에 온 날은 비가 몹시 내렸다. 허균은 객사에서 머물렀다. 계랑은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었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매창을 좋아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십년 뒤에도 이날의 첫 만남을 기억하면서 "만일 그 때에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들었더라면 우리가 이처럼 십년씩이나 가깝게 지낼 수 있었겠느냐."고 물었다. 그토록 여자를 좋아했던 허균이었건만 매창과는 끝내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정신적인 연인으로서 서로 사랑을 나눈 것이다.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매창이 얼마나 정감있는 여성인지를 알 수 있다.
허균이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면서도 그의 몸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에 조카딸을 허균의 방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매창의 마음씨 또한 놀랍다. 그토록 지혜있는 여인이었기에 처음 만나자마자 시를 주고 받으며 즐겁게 풍류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박덕은의 [풍류여인 열전 4] "이매창의 사랑일기"에 허균과의 이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곳 부안에 자주 드르겠소. 오면 박대해서는 안되오. 친구를 박대하면 복을 받지 못할 데니까."
"언제든 드르시면, 따뜻한 우정을 준비해놓겠습니다."
"그러길 바라오."
"그럼, 저는 이만 ……."
"잘 가오. 아쉽지만 이렇게 ……."
"……."
그의 곁을 떠나와서도 한참 동안 마음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도저히 그의 곁에 머물 수 없는 상황임을 잘 알면서도, 왠지 그이 곁에 머물러 있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여자의 마음이란 …….'
'마음은 생각나는 대로 몸을 잡아끈다더니…….'
'내 마음이 이렇게 지조가 없어서야 어디…….'
밤이 이슥하여 낮동안에 미리 말해두었던 후배 기생을 그의 침실로 보냈다.
그의 외로운 여정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려는 의도에서였다.
후배 기생에게 부탁을 해놓았다.
"누구냐고 물으면 '매창의 조카입니다.'라고 하렴, 알겠지?"
후배 기생은 영문도 모르면서 고개만 끄떡였다.
그녀는 정란이의 안내를 받아 객사로 향했다.
허균은 매창과 헤어진 뒤 몇 달동안 중국사신들을 접대하느라 무척 바빴다. 1608년 8월 공주 목사에서 파직된 허균이 부안현 우반 골짜기 정사암으로 들어와 쉬었다. 매창도 허균의 영향을 받아 천층암으로 들어가 참선을 시작했다.
천층 산 위에 그윽이
천년사가 서있어
상서로운 구름 속으로
돌길이 났어라
풍경소리 꺼져가고
별빛, 달빛 밝은데
온 산에 단풍이 들어
가을 소리가 그득하다
― 등천층암(登千層菴)
과거와 같이 애절한 그리움은 나타나 있지 않다.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서일까. 거기서 수양하며 참선했다. 계랑의 마음은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 한 조각 구름처럼 그리움은 가을 하늘을 떠돌았다.
계랑은 천층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어수대에 올랐다. 어수대는 변산의 의상봉(義湘峯) 정상에 있는 대(臺)의 이름이다.
천년 왕업의 옛터엔
겨우 어수대만 남았어라.
지나간 옛일이야 누구에게 물으리오.
바람결에 학이나 불러볼까.
― 등어수대(登御水臺)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세상 인심이라 허균이 떠나간 뒤 교산과 가까워 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계랑과 가깝게 지낸 태수가 있었다. 태수가 떠나간 뒤 고을 사람들은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워주었다. 어느 날 밤 달도 밝은데 계랑이 성황산 그 비석 옆에서 '산자고(山 )'의 슬픈 노래를 불렀다. 이로 인해 '매창이 눈물 흘리며 허균을 원망하였다'고 소문이 났다.
매창이 거문고를 타던 금대와 그가 즐겨마시던 혜천 우물이 아직도 성황산 기슭 서림 공원에 남아있다.
1609년 1월 주위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은 허균이 매창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비석 앞에서의 사건을 나무랐다. 10월 매창이 비석 앞에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부르던 모습을 허균의 친구 이원형이 이를 보고 시를 지었다. 그 시가 잘못된 소문을 증명하는 것이 되어 허균은 형조참의로서 세 차례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계랑은 세상과 담을 쌓고 대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병을 핑계 삼아 아예 손님도 받지 않았다.
잘못은 없다지만 뜬소문 도니
여러 사람들 입들이 무섭기만 하여라
시름과 한스러움 날로 그지없어
병난 김에 차라리 사립문을 걸어라
― 병중(病中)
매창과 허균의 만남은 육을 넘어선 사랑이었다. 시험하거나 서로 욕되게 하지 않았다. 시주(詩酒)로서의 친구 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만큼 그들은 시를 좋아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사귐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나이 차이도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았다.
허균은 서자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현실에 순응하기보다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다. 어쩌면 사회의 그늘에 있는 천민들을 동정하여 그들과 함께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궁벽한 변산 반도 시골 기생 매창과 사회의 반항아로서의 허균이 이런 점에서 자연 의기 투합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그들은 진정한 남녀간의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나눈 정신적인 나눔은 오래오래 남아 지금도 빛을 내주고 있는 것이다.
5. 촌은과의 재회 그리고 죽음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졌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었다. 이젠 서른도 훨씬 넘었다. 촌은을 만난지도 십오년이나 되었다. 꽃다운 이십에 정을 주고는 십오년을 그리움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정비석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난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어른도 이제는 백발이 성성하게 되셨겠지?'
어느날 서안 앞에 홀로 앉아 그런 명상에 잠겨 있노라니까, 홀연 어디선가 말방울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어마! 이 깊은 산중에 난데없이 웬 말방울 소릴까?'
계생은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을 들며 귀를 기울였다.
방울 소리는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 온다. 그 순간 계생은
'혹시 그 어른께서?'
그런 생각이 번개같이 떠오르자,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두려워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바위처럼 굳어진 자세로 눌러앉아 있노라니까 방울 소리가 문득 방 문 밖에서 멈춰지더니, 이윽고
"계랑아! 계랑은 어디 있느냐."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굵직한 그 목소리는 촌은 유희경의 음성이 분명하였다.
계생은 복바쳐 흐르는 흥분을 억제하려고 눈을 감으며 덤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별안간 두 줄기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1607년 매창은 유희경과 재회하였다. 처음 만난지 15년이 넘었다. 그 때까지 그들은 서로 잊지 못하고 애타게 보고 싶어했다.
옛부터 님찾는 것은 때가 있다는데
시인께선 무슨 일로 이리도 늦으셨는가
내 온 것은 님찾으려는 뜻만이 아니라
시를 논하자는 열흘 기약 있었기 때문이라오.
― 중봉(重逢)
촌은이 완산에 갔을 때 매창이 촌은에게 10일간만 묵어가라고 애원하여 이 시를 지어주었다. 기약없이 떠났다가 늦게사 찾아왔기에 유희경은 매창의 기약 때문이라고 변명을 했다. 보고 싶어하는 촌은과 매창의 사랑하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나타나있다.
촌은이 떠난 후 매창의 병세는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죽음이 목전에 왔음을 예감했다.
독수공방 외로움에 병든 이 몸은
기나긴 사십년이 길기도 해라
묻노니 인생은 그 얼마나 사는고
가슴 속 시름이 맺혀 옷 적시지 않은 날 없네
― 병중수사(病中愁思)
촌은과의 재회 삼년 후 매창은 죽었다. 서른 여덟의 한많은 세상을 두고 갔다. 매창은 죽기 전에 촌은을 한번만이라도 꼭 만나고 싶어했다. 신분에 누가 미칠까 촌은에게 끝내 알리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도 임을 먼저 배려한 아름다운 계랑이었다.
촌은은 계랑의 부음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자신에게 온 정성을 다 바쳤던 계랑. 어떻게 해야 넋을 위로할 수 있을까. 서둘러 부안을 내려갔다. 그녀의 무덤 앞에서 끝내 복받쳐올라 오열을 터트렸다.
촌은은 가슴에 져며오는 아픔을 이렇게 읊었다.
맑은 눈 하얀 이에 푸른 눈썹의 계량아
홀연히 뜬 구름 따라 간 곳 아득하다
꽃다운 넋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군가 너의 옥골 고향에 묻어주리
객지의 초상이라 문상객이 다시없고
오로지 경대 남아 옛향기 그윽하다
정미년 간 다행이도 서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
― 차임정자도옥진운(次任正字悼玉眞韻)
이제 님은 가고 빈 경대만 남아 있다. 촌은의 가슴 속에다 매창은 영원한 둥지를 틀었다. 촌은은 매창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누가 나를 찾아 싸리문 두드리나
담은 헐어 쓸쓸한데 난설만 흩날린다.
홀로 앉아 설중 매화나 읊고 삶이
늙은 나의 사는 보람 고작이라네
― 설중상매(雪中賞梅)
돌아앉아 눈 속의 매화를 쳐다보며 매창을 생각하고 있다. 담담한 마음이지만 80세가 되도록 아직도 매창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일생을 잊지 못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단 한번 왔다가는 것이다. 단 한번 찍힌 화인은 영원히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이다.
허균도 계량의 소문을 듣고 부안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성소복부고(惺所覆 藁]에 '애계랑(哀癸娘)' 두 수가 전한다. 한 수를 소개한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가 설도의 무덤 곁을 찾아오려나.
가람 이병기도 매창을 추모하였다. 사람은 갔지만 매창의 향기는 지금도 남아있다. 예술은 천년을 남는다고 했던가. 가람의 '매창뜸'이란 시조이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 마는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하는지
두 빰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나삼상(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은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5리 남짓되는 봉덕리 공동 묘지에 묻혔다. 그가 그토록 즐겨 뜯던 거문고도 함께 묻었다. 그 뒤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불렀다. 부안읍 봉덕리 4구 교도부락의 공동묘지이다.
그가 죽은 뒤 45년 을미 1655년(효종 6년)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그 뒤 13년 후 1668년 10월에 부안현 아전들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58편의 시를 모아 [매창집]을 엮어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58수라고는 하지만 총 54가 남아있다. 시조는 3수가 전한다.
1917년 3월 옛비석의 글씨가 이지러졌으므로 부풍시사에서 높이 4척, 폭 2척의 비석을 다시 세웠다.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부풍지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에는 마을의 나무꾼들이 매년 벌초를 해왔다고 한다. 무식한 나무꾼들도 매창의 거문고와 시를 사랑했던 것이다. 남사당이나 가극단 유랑극단이 들어올 때면 읍내에서 공연을 하기 전에 이곳 매창이뜸 무덤을 찾아와서 한바탕 굿판을 벌였다고 한다. 이 매창의 무덤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 65호]로 지정되어 있다.
1917년 4월 27일 매창 기념사업회(회장 김태수)에서 매창이 즐겨노닐던 성황산 기슭 서림 공원에다 매창시비를 세웠다. '이화우 흩뿌릴제……'가 송지영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금대와 혜천 한 가운데이다. 아울러 배꽃이 흩날리는 봄철이면 매창문화재를 개최하고 있다.
1997년에는 부안군에서 서림공원 문학마당에 매창시비를 세웠다. 매창 시비에 '백운사'라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한시 '백운사'가 매창의 시라는 전거가 없다. 어쨌든 삼백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시혼은 뜻있는 사람들의 흉금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남은 다 자는 밤에 내 어이 홀로 깨어
옥장(玉帳) 깊은 곳에 잠든 님을 생각는고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더라
얼마나 그리웠기에 이런 정한의 시만 읊었을까. 거문고를 뜯으며 청아한 일곡을 눈물과 함께 불렀을 매창을 생각해본다. 그녀의 인품과 인격이 시에 실려와 지금도 연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유달리 정이 많고 고요하면서도 매화처럼 의지가 굳은 여자, 자연을 관조하면서도 님에 대한 연모의 정을 끝없이 노래했던 여자이다. 참으로 지고지순한 매창의 사랑이다.
* 출처 : '보내고 그리는 정' 시조박물관 웹진 출처 : 추창호의 시조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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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황진이편 / 신바회 
매창(梅窓)과 촌은(村隱) 유희경과 허균의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