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진이편 / 신바회
1. 총각의 황진이에 대한 연정 황진이의 생몰 연대는 미상이며 이조 중종때 개성 명기로만 알려져 있다.문집이나 연보도 남아 있지 않다. 산재해 있는 문헌에 그녀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는 야사들이 존재할 뿐이다. 황진이는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나 어릴 때 사서삼경을 읽고 시·서·음률에 뛰어났으며,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현금이었는데 자색이 매우 고왔다. 그녀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었다. 어느날 변부교 아래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의관이 화려하고 얼굴이 수려했다. 그 사람은 현금에게 미소와 손짓을 보냈다. 현금의 마음은 흔들렸다. 해는 지고 빨래하던 여인들도 다 갔다. 그 사람이 현금 앞에 나타나 물 한 바가지 떠달라고 하였다. 반쯤 마시고는 현금이 보고 마셔보라고 했다. 그런데 웬 일인가? 그것은 물이 아니고 술이었다. 현금은 술을 먹은 것이다. 합환주가 되어 둘이서 그날 밤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탄생한 것이 진이었다.진이는 절세의 미인이었으며 재예,가창에 매우 뛰어났다. 사람들은 그녀를 선녀라 불렀다. 황진이의 전설같은 출생담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태준은 <황진이>에서 떡거머리 총각과 황진이의 첫대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몇 해의 세월이 흘렀다. 진이는 겨우내 방안에서만 기르던 백매화 한 분을 뒤뜰안 양지쪽에 내놓았다.저녁때 그것을 들여놓으려 나왔던 참이었다.그런데 웬 실이 끊어진 연하나가 너훌너훌 날아오더니 그만 배나무 가지에 걸리고 말았다.고샅길로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가 우우우 들려왔다.이 때 동저고리 바람의 총각녀석 하나가 쑥담 위로 얼굴을 쑥 내밀고 있었다.기와에 손을 짚고 숨만 헐덕거릴 뿐 감히 뛰어넘어오지 못했다. 진이 매화분을 섰던 자리에 내려놓고 을르듯 소리질렀다. "눈에 연만 뵈고 남의 집 내정은 건 안보여?" 이때 다른 한 아이가 '쿵 하고 담 밑으로 떨어졌다. 순간 그 총각은 눈이 휘둥글해져 진이를 처다보았다. 연예는 관심조차 없어졌다. 진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로 몇 해전 배를 훔치러 갔었던 그 배나무, 그 처녀에게 혼쭐이 났었던 뜰 안이었다. 그 때 한 번 보고 나서 왜 그런지 무시로 생각났었다. 배꽃처럼 눈부시던 달밤 눈에 삼삼했던 그 얼굴의 주인공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총각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총각은 말 없는 담벽만 왔다갔다하며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황진이는 배훔치러 왔다 자기에게 혼줄이 났고 연 잡으러 왔다가 역시 자신에게 체신 깎인 하잘 것 없는 떡꺼머리 총각에게 눈꼽만치도 애정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떡거머리 총각의 진랑이에게 향한 연정은 걷잡을 수 없었다. 자신의 심정을 고백할 수도 없었다. 자리에 눕게 되었고 급기야는 어느 이른 봄 하소연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총각의 죽음이라 상여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장지로 가는 길에 상여가 진랑의 마당에 이르러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이태준의 총각의 죽음 대목을 보자. "게 서서 묻는 말만 대답하오." "……." 젊은이는 한 번 진이를 쳐다보자 마주 얼굴을 들지 못한다. "단지 임종에 무어라 유언했는지 들었으면 들은대로 전해주오," "임종에 가서야 당혜 한 쪽을 내어뵈었소. 그리고 유천골 이 댁을 가리키며 죽은 몸이라도 이 댁 문전을 다시 한번 지나게 해달라고 그랬소." "그것 뿐이오?" "당혜 한짝을 같이 묻어달라고 그랬소.그리고는 눈을 감았소." 진이는 죽은 총각을 위해 자기 적삼과 잃어버렸던 당혜 한 짝을 마저 내어주었다. 제문을 지어 제사도 지내주었다. 그리고서야 상여는 '어어야,어야' 구슬픈 소리를 내며 동구 밖으로 사라져갔다. 치마자락 한번 스치지도 못하고 죽도록 사모한 그 떡꺼머리 총각.자기를 절름발이 양반이니, 서녀니 하고 조롱하고 다니던 사람들에 비하면 그 얼마나 인간적이었는가. 목숨이 끊어질때까지 말 한마디 못한 채 죽은 그 떡거머리 총각이 어쩌면 진이에겐 정말 인간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운명의 장난이라하던가.떡꺼머리 총각의 우연한 죽음은 황진이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야말았다. 하루는 뒷창을 열고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승달이 서산 하늘에 걸려있다.죽은 떡꺼머리 총각이 떠올랐다. 비통한 생각이 들어 자신이 쓰던 얼레빗을 바라보며 한시 두 구를 지었다. 누가 옥을 찍어내어 직녀 얼레 만들었나 견우 가고 오지 않으니 허공에다 던졌구나 -영반월(詠半月)- 견우를 위해 빗던 자신의 얼레빗을 허공에 던졌다. 그 얼레빗이 허공에 저렇게 초승달로 걸려 있는 것이다.견우는 돌아올 수가 없다. 진이는 온전한 양반이 아니었다. 이제는 마음과 몸을 남에게 허락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완전한 처녀가 아니었다. 청상과부로 한 평생을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자유 분방한 진이에게는 구닥다리 도덕이나 제도에 묶여 살아가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은 일인지 모른다. 진이는 기생이 되기로 결심했다.걷잡을 수 없이 져며오는 후회와 모멸,자기를 연모하다 죽은 떡거머리 총각에 대한 참회 등이 그녀의 운명을 돌리게 만든 것이다. 어머니의 간곡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이는 끝내 기계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황진이는 명기로서 이름을 떨쳤다. 남성으로서 그를 한 번 만나보기를 원치않는 이가 없었다. 시정 거상들은 많은 돈을 가지고 그녀의 환심을 사려했다.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풍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에게는 오만하지 그지없었다. 짓궂고 장난꾸러기였으며 남성들을 울리고 농락하였다. 점잔빼는 남성들의 가면을 벗겨 그의 생태를 직시하고 자신에 대한 긍지를 재인식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걸려든 비극의 주인공이 30년 면벽승 지족선사였다. 2.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지족 선사는 송도 근교 깊은 산 속 암자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도해온 스님이었다. 송도 사람들은 그를 생불이라고 존경하였다.그래서 진이는 지족 선사를 택했다. 하얗게 소복한 채 지족선사를 찾아갔다. "뜻하는 바가 있어 불제자가 될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청상과부인데 스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슬픈 표정으로 애원하였다. 깊은 산 속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온 스님은 난데없는 미녀의 출연에 당황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자신의 수양부족을 탓하며 '나무아미 타불 관세음 보살'을 되뇌이며 열심히 불도만을 닦았다. 풍경소리도 그치고 밤은 깊어갔다. 이젠 할 말이 없다.진이의 몸가짐만이 등불 아래서 고요히 흔들릴 뿐이다. 지족 선사는 자신과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착 달라붙은 비에 젖은 홍시같은 살결을 훔쳐보며 선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요염한 교태 앞에 그만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3 0년 면벽도 하루아침에 공염불이 된 것이다. 열반의 세계에 귀의하려던 지족선사는 오욕이 끊는 육체의 야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목적을 달성한 진이는 암자를 빠져나왔다. 지족선사는 법복도 염주도 버리고 황진이를 찾아 헤매었다. 송도 거리의 반걸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의 생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식소록, 조야휘언(識小錄,朝野彙言)에서 황진이가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망치게 한 것도 나 때문이었다"라고 후회하고 있다. 인간의 약점을 찌른 애닯은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유주현의 <녹수는 임의 정이> 일부를 감상해보자. 해가 한 나절이 되었을 때 진이는 허전한 가슴을 안고 지족암을 나섰다. 몹시 부끄러웠다.햇빛에 부끄럽고,산에,나무에,날짐승에게 부끄러웠다.진이는 일부러 귀법사 어귀를 피해 산을 내려오다가 기어이 서소옥을 만났다. "왜 본사엔 들르지 않고 내려 가시려나요?" 합장을 한 채 물어오는 서소옥의 시선을 피한 진이는, "부끄럽습니다.스님." 간신히 한마디 할 수 있었다. "기어코 지족스님을 파계시켰군요?" 원망하듯 말하는 서소옥에게 "아닙니다.그분은 이미 불신불심이 다 된 어른인데 파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이는 아직도 지족의 뜨거운 여운을 혈관 속에 느끼면서 다시 강조했다. "지족 선사께는, 그 청정되고 평안한 그분의 마음에는 이 세상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어요." 청량봉 밑에는 아침인데도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었다. 진이는 올 때처럼 머리에 쓰개치마를 썼다. 어쩐지 패잔하고 돌아가는 것 같아서, 자기의 얼굴이 처량해 보일까 봐서 눈만 남기고 가렸다. "혹 기회 있으시거든 지족 선사님께 말씀 드려주세요." "뭐라고요?" "진이는 참패했다면서 쓸쓸히 웃고 하산하더라고요." 지족선사가 고승이었다면 그러한 유혹은 이겨낼 수 있었어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족 선사도 선사 이전에 남자이다. 그런 여자의 요염한 교태 앞에 무너지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으랴? 그것이 더 인간적일지도 모른다, 도승의 가면을 벗긴 것이 통쾌할 수도 있겠으나 진이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기뻐해야할 하산 길은 진이에게는 참담하고 후회스러운 것이었다.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승이었다. 진이는 이렇게 무참하게 쓰러질 줄 몰랐다. 도승도 평범한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잘 것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진이는 깨달은 것이다. 여기에서 그녀의 인간다운 면모를 만날 수 있다. 3. 서화담에 대한 연정 서경덕은 당시 도학군자로서 학덕과 인격이 널리 알려진 위인이었는데 황진이의 농락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느날 화단정사에 놀러갔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황진이가 별안간 복통을 일으켜 신음하기 시작했다. 서경덕은 한 채밖에 없는 이불을 펴주었다. 자기는 늦도록 책을 읽었다. 꾀병을 앓으면서도 연방 서경덕의 통태를 살폈으나 일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눈을 떠보니 서경덕은 웃목에 조그마한 포대기를 얆전히 개켜놓고 단정히 책상 앞에앉아 있었다. 어제의 자세 그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황진이는 자기의 부질없는 연극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선생님 송도에는 삼절이 있다는데 그것을 아십니까?" 서경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첫째는 박연폭포요,둘째는 선생님이시고 셋째는 진이입니다." " 이 비록 아름다운 선학(善謔)이나 또한 진지이니라." 서경덕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서화담은 성종 20년(1489)에 나서 명종 1년(1546)까지 산 당대의 석학이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않고 학문과 후학에만 전념하였다. 황진이도 서화담에게 글을 배우러 오는 문하생이었다. 진랑이 오는 날이 뜸해졌다. 밤은 깊고 주위는 적막한데 우수수 낙엽지는 소리가 들린다.오 는가 싶어 영창을 열고 기울여보았으나 주위는 더욱 적막하기만하다. 다시금 영창을 닫았다. 불을 껐다.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정신은 자꾸만 맑아졌다. 기다려도 진이는 오지 않았다. 서화담은 초연히 앉아 어둠 속에서 이렇게 노래를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귄가 하노라 진랑인들 스승의 인자한 모습,부드러운 음성을 보고 듣고 싶지 않았겠는가? 진이는 문 밖에 와있었다. 자신의 사무치는 마음을 화담 스승도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음 속 깊이 깔려있던 그 동안의 오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참을 추스렸다.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님을 속여 월침삼경에도 올 뜻이 전혀없는가하고 탄식하고 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도 절절할 수 있을까?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님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님은 올 생각조차 없다. 그렇다고 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서경덕의 황진이에 대한 연정과 황진이의 서경덕에 대한 연정은 마음 속에다 깊이 간직해두었던 것이다. 잎지는 소리는 서경덕에게는 환청으로 들려왔고, 진이에게는 낸들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서로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서화담의 죽음을 진이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명월은 자기 자신을 청산에 비기고 서경덕을 녹수에 비겼다. 녹수는 없고 청산만 남은 것이다.물 없는 청산이다. 이 무슨 허무한 인생이란 말인가. 이렇게 인생은 허망하기 그지 없다. 꼭이 서화담의 죽음을 한탄하여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청춘 시절에 흠모했던 인물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생 무상을 노래한 것이리라. 4.벽계수를 유혹하며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부른 황진이의 시조 한 수가 전해져내려오고 있다. 종실 벽계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한번 진랑이를 보면 빠져버리나 나는 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쫒아버리겠다.' 이렇게 호언 장담하고 벽계수는 송도로 내려왔다.왕가의 귀족답게 벽계수는 의젓하고 냉정했다. 찬바람이 휙 돌고 매정스러우리만큼 까다로왔다. 그는 가을밤 송도를 구경하기 위하여 나귀를 만월대로 몰았다. 진이의 낭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래 소리에 뒤를 돌아보다 그만 나귀 등에서 떨어졌다. 진랑이 웃으며 이는 명사가 아니고 한낮 풍류랑이라하고는 즉시 돌아가버렸다. 벽계수의 양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못난 벽계수야, 인생은 한번 가면 그만인데 천하의 명기 명월이가 무르녹아 있으니 어찌하여 나와 즐길 줄 모르고 가려고 하느냐. 함께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양반 계급에 대한 지독한 풍자와 야유가 담겨있다.양반 계급을 우습게 본 것이다. 여기서 남자를 흐르는 물에 비유하고 공산에 뜬 명월을 자기로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남존 여비의 시대에 더구나 양반 계급이 극심한 때에 기생인 자기를 명월로 비기고 종친의 한 사람을 산골물로 비유했다는 것은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인으로서의 자존심 미인으로서의 자존심일 것이다. 사회적 신분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때 느끼는 여자의 분노가 이 시에서 저절로 배어나온 것이다. 5.현대판 계약결혼 황진이와 가장 오랫동안 동거한 이는 선전관 이사종이었다. 이사종은 당대의 명창이었다. 그는 황진이와 풍류를 즐기기를 원했다. 그래서 천수원 천변에서 의관을 벗고 누워 노래를 불렀다.진이는 산책을 나왔다가 천변 풀밭에서 쉬고 있는 참이었다.'저 노래소리는 분명 당대의 풍류객 이사종일시 분명하다' 하며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 진이는 이사종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 며칠간 풍류를 즐겼다. 진이는 6년간 같이 살아보자고 했다. 이사종도 그러마라고 하였다.이리하여 그들은 6년간 조건부 동거에 들어갔다. 그 이튿날 진이는 한양의 이사종 집으로 가재를 옮겼다.거기서 삼년 간 이사종 식구들을 먹여살렸다. 이사종도 은혜를 갚기 위하여 삼년 동안 송도에서 황진이 식구들을 먹여살렸다. 이사종의 집에서 삼년,황진이 집에서 삼년,조건부 6년이 다 되었다. 진이는 약속한 햇수가 다 찼으니 이젠 헤어지자고 하였다.6년간의 동거생활을 마치고 진이는 이 사종과 깨끗하게 헤어졌다. 현대판 계약 결혼이다. 그러나 어찌 인간의 정을 두부 자르듯 매정하게 끊을 수 있겠는가. 폭풍한설 긴긴 밤은 진이에게는 차라리 형벌이었다. 살아왔던 운우의 정을 그리 쉽게 단념할 수는 없는 법이다.이사종에 대한 그리움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동짓달 기니긴 밤 한 허리를 둘러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이어든 구뷔 구뷔 펴리라 사랑하는 님은 누구라도 좋다. 떡거머리 총각,지족선사,서화담이라도 좋다. 소판서, 벽계수,이 사종이라도 좋다.갈수록 채울 길 없는 허전한 마음을 진이는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진이는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동짓날 긴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사랑하는 님이 오시는 날 밤에 굽이굽이 펼쳐놓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다정 다감한 여인인가. 겉으로는 이사종과 깨끗하게 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진이에게도 가슴 속에 쌓인 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올올이 풀어내야만 살 것 같았다.독백치고는 너무나 안타깝다. 소세양과의 사랑은 너무나 짧았다. 호는 양곡 또는 퇴휴당이다. 시문으로 저명했으며 중종 4년에 등과하여 대제학을 지낸 바 있는 명사였다. 동국시화휘성에 소양곡과의 30일간의 로맨스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소세양은 젊어서부터 여색을 좋아했다. 여자를 보고도 마음이 동요치 않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고 했다. 송도의 명기 진이가 절세의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친구들과 약속했다. "듣건대 송도의 황진이가 절세의 미인이라지만 나는 그와 30일만 동숙하면 추호의 미련도 없이 깨끗하게 헤어지리라.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문다면 너희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하고 호언 장담하였다. 송도에 가서 진랑을 보니 과연 듣던 대로 절세의 미인이었다. 그들은 30일의 약속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마침내 기일이 내일로 다가오자 그는 진이와 더불어 남루에 올라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진이는 헤어지는 슬픔의 기색을 조금도 내보이지 않았다. 다만 헤어지는 마당에서 어찌 할 말이 없겠느냐며 진이는 시 한수를 소세양에게 써주었다. 달빛 아래 뜰에는 오동잎 모두 지고 찬서리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다락은 높아 높아 하늘만큼 닿았는데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소리는 차기가 비파소리 피리에 감겨드는 그윽한 매화향기 내일 아침 눈물 지며 이별하고 나면 임그린 연모의 정 길고 긴 물거품이 되네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 '내가 어찌 인정이 없겠느냐.'하며 소세양은 하루를 더 머물며 사랑을 불태웠다. 그 후 친구들에게 사람이 아니라는 놀림을 받았으나 그는 전혀 괘념치 않았다고 한다. 가지 말라는 말 한마디만 하였던들 소세양은 안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매사에 다정다감한 남자였다. 그 사람은 영영 가버리고 말았다.자꾸만 설움이 복받쳤다.견디다 못해 진이는 붓을 들었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몰라 하노라 남자를 허물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였다. 남들처럼 그리워할 줄 모르겠느냐고 자책하고 있다. 있으라고하면 구태어 가겠느냐고 몸서리 치고 있다. 사무치게 져며오는 그리움이 너무나 절절하다. 되돌아서서는 쏟아내는 회한의 정을 나도 모르겠다고 하고있다.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무력함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겠는가. 가슴을 치며 다 내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진이도 한낫 평범한 아녀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6. 금강산 기행 황진이와의 애정 관계에 있던 선비로 이생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재상의 아들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누군지 분명치 않다. 진이가 금강산이 천하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꼭 한 번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행할 만한 이가 없었다. 마침 이생이라는 위인이 있어 금강산에 동행을 하자고했다. 호방한 이생은 함께 자진하여 따라나섰다. 이생의 하인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이생으로 하여금 양식을 짊어지게 하고 진이는 망혜에 죽장을 짚고 금강산으로 떠났다. 식량도 떨어졌다. 절에서 걸식도 하고 식량도 구했다. 그 때마다 진이는 몸을 팔기도 하였다. 금강산으로 들어갈수록 굶주림과 피곤에 지쳐 얼굴은 자꾸만 초췌해져 갔다. 이때 송림 속에서 유생 여러 명이 주연을 베풀며 놀고 있었다. 진이가 공손히 배례하니 한 좌석을 내주었다. 한 선비가 술을 권했다. 진이는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그녀가 잔 잡고 한 곡조 뽑으니 청아한 음성은 온 산림을 흔들었다. 유생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그들은 '안주도 마음대로 들구려.'하면서 극진히 대접했다. 진이는 '나에게 하인 하나 있는데,불러서 술과 남을 음식을 먹이는게 어떻겠습니까?' 하고는 이생에게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였다. 이쯤되면 황진이의 성품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양반도 굶주림과 사랑 앞에서는 체면이고 무었이고 없는가 보다. 양반을 하인 취급한 것 같지만 이는 양반에 대한 진이의 신중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7. 황진이의 죽음 황진이는 언제 어디서 몇 살까지 살다가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유언에 관한 이야기가 몇 문헌에서 전해내려오고 있다. 진이가 장차 죽으려 할 때 가인에게 부탁하였다. "나 때문에 천하의 남자가 자신들을 사랑하지 못했다.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동문 밖 물가에 버려달라.개미와 벌레들의 밥이 되어 천하의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를 하게 해달라." 가인이 그 말대로 버려두었더니 한 남자가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었다. 지금 장단 구정현 남쪽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 진이는 생애가 짧았다. 인생이 한창 무르익은 40전후에 죽었다. 그녀는 살아있을 동안 남자에 대한 죄의식에서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기를 사모하다 죽은 총각의 죽음에서 일찌기 인생의 허무를 깨달았다.사 랑도 결국 허무하기 짝이 없음을 온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황진이의 시조 한 수를 소개한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거든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아니 오느매라 황진이의 자취가 서려있는 송도의 거리,만월대,박연폭포,황진이의 무덤이 있다는 장단 구정현 남쪽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감상에 젖을 수가 없어 유감스러울 뿐이다. 8. 영원한 스승 시조 한 수 현대 시조의 대가 가람 이병기는 "시조문학을 하시면서 스승으로 모신 분이 누구냐?"는 기자의 질문에 거침없이 "황진이 시조 한 수가 나의 스승"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글 일부를 인용해본다.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든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야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기자는 그대로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조작가로서 선생을 키워주신 은사가 누구냐고 묻는 기자의 말에는 아무 대답도 않고,이씨는 어수선한 오후의 학교 사무실에서 이렇게 시조를 읊은 것이다. "선생의 스승은 누구시냐고 지금 여쭈었는데요?" 기자가 이렇게 재차 물어도,이씨는 이무 대답이 없이 또 한 번 꼭 같은 시조를 외운다. 이 어찌된 일인가 영문을 모르고 앉아 있으려니까, "하하하하!" 하고 너털 웃음을 내놓으신다. "왜 웃으십니까?" "내 스승의 이름은 이렇게 길답니다." "네?" "지금 내가 왼 그것이 내 스승의 이름입니다.상당히 길지요? 기자는 그제서야 이씨의 말귀를 알아들었다.재미있는 어른이라고 혼자서 웃노라니, "불행히 내게는 스승이 없었습니다. 내가 시조를 지어 볼까하고 생각한 것은 퍽 어려서 인데,처음에는 한시를 짓다가 이렇게 어려운 글로 시를 짓는다는 것이 헛된 노력같이 생각되었고,아무리 한자가 조선 사람의 글이 된 시대라 하더라도, 역시 조선의 감정을 조선말 아니면 표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라는 것을 우리말로 지어 볼 생각이 들었으나, 그 때는 불행히도 나를 지도해주실 선생이 없어서 부득이 황진이의 시조를 유일한 스승으로 삼고 연구했었지요." ……중략…… "그러면 아마 황진이의 시조를 맨처음에 그렇게 읊으신 데는 무슨……". "있지요. 지금까지 내가 본 시조 중에는 이만큼 형식으로나 기교로나 구성으로나 잘 짜여진 것을 못보았습니다. 황진이 시조는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이 5·6수에 불과해도,그 5·6수가 정말 주옥같은 것입니다. 고금을 통해서 이만큼 완성된 수작이 없지요. 그 기교란 무서우니까. 흔히 보면 공연히 글자 수와 형식에 사로잡혀서 꼭 박아낸 것만 같아서 염증을 내게 합니다. 그러나 4백년 전의 황진이 시조는 실로 완벽을 이룬 것이지요. 이 정도에만 이른다면 시조로서 표현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씨는 기자를 세워놓고 또 다시 황진이의 시조를 고요히 읊는다. ----------------------------------------------------------------- * 시조전문웹진 '그리고 보내는 정은'에서 출처 : 추창호의 시조사랑 ☜ 
|
| 
|
 한우와 임제 이야기 |
 지고지순한 매창의 사랑 / 신바회 |
